혼자 뜨는 별 Autumnstar 10
시연의 눈엔 주위 사람 모두가 엄마 편이었다. 엄마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엄마를 말리는 사람을 시연은 자라면서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엄마를 둘러싼 사람들 대부분이 엄마의 친정붙이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매우 신경을 썼던 엄마는 집 밖에서는 안에서와 다르게 행동했다.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도 그러려니, 주위에는 엄마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엄마는 세상 모두가 자기편이라고 착각하며 마음대로 주도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엄마는 시연의 친가 식구들에게는 인색했으나, 반대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마음에 들기 위해 무척 애를 쓰는 듯 보였다. 시연도 방학이 되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외가에 성적표를 들고 가 보여드렸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 엄마는 형제 중 오직 자신만이 외할머니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했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아이처럼 '우리 엄마'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곤 했다.
시연은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외가에 자주 놀러 갔다. 외가에 맡겨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동경에서 유학을 한 분이었고, 외할머니는 지방 유지의 딸로 유복하게 자란 분이었다. 두 분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했고 두 분의 결합이 얼마나 장안화제였는지를 시연은 어릴 때부터 이모들한테 하도 들어서 외울 지경이었다. 대단한 부모 밑에서 자란 특별한 사람들이란 선민의식이 그들을 지배해 그런지, 외가 식구들은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냉소와 배타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명예나 체면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지키고자 하는 기준이나 목표가 멀고 어려운 사람일수록 헛발질을 하기 마련이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남을 돕는 척하거나 많이 아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기도 한다. 외가의 분위기는 소박함이나 따뜻함이나 행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이면 남을 헐뜯는 말을 일삼거나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넓고 깨끗한 외갓집이 어쩐지 시연에게는 차갑고 휑뎅그렁하게 느껴지곤 했다. 엄마의 형제들은 겉으로는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것처럼 보였지만 늘 누군가를 왕따 시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큰 이모였다는 걸 시연은 나중에 알았다.
큰 이모 영순은 성실한 공무원으로, 결혼 후에도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마음이 어질고 형제들 중 가장 남을 배려했다. 엄마 다음으로 태어나 2남 3녀 중 둘째였던 큰 이모 영순은 집안 대소사를 엄마 대신 도맡아 치러냈고, 맞벌이를 한 덕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선물도 언제나 비싸고 좋은 걸로 해드리곤 했다. 형제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형제들은 영순을 얕잡아 보고 무시했다. 영순 듣는 데서 대놓고 영순의 남편과 아이들의 험담을 하기도 했다. 시연은 어릴 때 큰 이모가 울면서 외가를 뛰쳐나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는데, 그러고는 몇 년씩 큰 이모는 외가에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시연이 미국으로 건너오고 얼마 안 돼, 엄마는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작은 이모 정순과 절연하고 다시는 보지 않았다. 시연은 그 이유를 나중에 시훈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정순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조금씩 엄마와 정순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는 정순을 예전과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정순이 마치 자신의 딸인 것처럼 보호자를 자처하며 정순이 가는 곳 어디나 따라다녔고, 심지어 정순의 친구 모임에까지 같이 갔다. 그러나 유학 중 결혼해 가정을 이룬 정순은 그런 언니가 귀찮고 부담스러웠을 거라고 시훈은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성스럽게 담근 김치를 들고 동생의 집을 찾았던 엄마는 그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정순의 집 앞에서 전화를 한 엄마에게, 집에 손님들이 있으니 그냥 돌아가 달라고 정순이 말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정순에게 몹시 서운해했으며 그날 이후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훈의 말을 듣고 시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김치 나 주지." 했었다. 엄마는 딸인 시연에게는 김치를 담가준 적도, 정순에게 그랬던 것만큼 살뜰히 챙겨준 적도 없었다.
엄마는 그 후 정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몇 번 연락을 시도했지만 정순은 끝내 엄마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엄마는 정순과 만날 때면 늘 험담을 하고 끼워주지 않았던 큰 이모 영순과 연락하기 시작했다. 영순은 언제나 변함없이 엄마에게 헌신적이었다. 시연도 외가 식구들 중 큰 이모 영순과 제일 친했다. 시연의 가족이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영순은 밥을 사주고 반찬을 해다 주었다. 그러나 엄마는 늘 그랬듯 시연과 영순이 단둘이 만나는 걸 막으려 했고, 시연이 영순에게 선물을 하거나 전화를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여전히 시연의 인간관계를 자신이 정한 범위 안에서 통제하고 관리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 시연이 서울에 갔을 때 영순이 시연에게 전화를 해왔고, 둘은 시연의 숙소 근처 카페에서 만나게 됐다. 정말 오랜만의 둘만의 만남이었다.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한정식을 먹으며 전통차를 마시며, 시연과 영순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따뜻하고 정다운 사람의 온기에, 시연은 가슴에서 딱딱한 얼음덩이 같은 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영순은 마음씨 곱고 정 많은 옛날 그대로였다. 아웃사이더들끼리 통하는 게 있었던 듯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며, 시연과 영순은 그 후로도 만남과 연락을 이어갔다.
그렇게 1년쯤 흐른 어느 날, 시연과 통화를 하던 엄마가 시연과 영순 사이에 문자로 주고받은, 엄마는 알 리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알면 안 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며칠 후 영순과의 통화에서 시연은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동안 영순은 시연과 통화로 나눈 이야기, 문자로 주고받은 이야기 모두를 엄마에게 알리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전해 듣는 걸로 모자라 시연과 주고받은 문자나 사진을 모두 캡처해 보내라고 했고, 언니의 요구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영순은 그대로 해주었다고 했다. 영순과 만나면 엄마는 영순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이나 문자를 확인했다고도 했다. 그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라 별생각 없이 그랬다,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 영순은 몇 번이나 시연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의 요구를 꼭 들어줘야 했을까,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시연은 아쉬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큰 이모 영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을 인정해 주기 시작한 언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시연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시연은 영순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