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뜨는 별 Autumnstar 8
딸아이 은지가 여덟 살 되던 해, 동준은 미국 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시연은 살던 집을 급하게 전세 놓고 짐을 정리했다.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던 시연은 당장 낯선 곳에 아이를 데리고 가 적응할 일이 걱정이었다.
시연이 살게 된 곳은 미서부의 작은 타운이었는데, 다행히 사람들이 친절하고 물가도 그리 비싸지 않은 곳이었다. 세 식구가 그렁저렁 적응하며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시연은 오랜만에 아빠와 통화를 했다. 엄마가 미국에 가보고 싶어 병나게 생겼으니 엄마를 한번 초대해 줄 수 없겠냐는 아빠의 목소리 너머로, 뭐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는 받아쓰기하는 사람처럼 엄마의 말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
그 후 십여 년 동안 엄마는 아빠와 함께 1년에 한 번 혹은 2년에 한 번 시연의 집을 방문해 한두 달씩 머물다 갔다. 시부모님의 방문과 겹치거나, 양쪽 부모님의 방문이 연달아 이어질 때면 시연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 지냈다. 길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부모님들이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연은 부모님의 이런 처지가 아기가 처음 세상에 나올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먹일 수도 입힐 수도 없는 존재인 아이들에게 부모의 도움과 보살핌은 당장 생존과 연결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끼 식사를 챙겨드리고 잠자리를 봐드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며, 시연은 부모님들의 얼굴에 어리곤 하던 아이 같은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들의 눈빛에서, 누군가에게 기댈 때 느껴지는 안온함이 묻어났다. 나이를 먹어도 마음속에 어린 나를 데리고 사는 게 우리구나, 시연은 생각했다, 어린 나도 지금의 나도 행복하면 좋겠다고.
어느 해 시연의 집에 온 엄마는 서울에 전세 놓은 시연의 집을 시세의 반 값만 받고 시훈에게 주라고 말했다. 동준의 파견근무 기간이 몇 년 더 연장된 때였다. 결혼하고 아직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시훈이 엄마 마음에 걸린다는 게 이유였다. 그동안 엄마가 부동산에 이것저것 캐물은 이유며, 세입자가 바뀔 때마다 시연의 집에 살피러 간 이유를 시연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얼핏 보면 시연에게 신경 써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엄마는 벌써 오래전부터 시연의 집과 시훈을 연결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시연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소유물과 같으니 시연이 가진 건 다 자기 거라고, 엄마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남겨놓고 온 집은 시연과 동준에게 집 이상의 의미를 가진 집이었다. 언젠가 서울로 돌아갈 꿈을 꿀 수 있는 희망, 타국에서 쪼들릴지 모를 때를 대비한 든든한 보루였다. 시훈은 대기업에 다니며 집을 살 적절한 기회를 보고 있었을 뿐 어려운 형편도 아니었고, 전세금이 오를 때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기도 했다.
시연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고 나서, 언젠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나 그동안 엄마 땜에 많이 힘들었어."
시연은 어릴 때부터 당해 온 차별, 이모 정순의 못된 행동들로부터 엄마가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던 것, 시훈의 결혼 등 중요한 일들을 정순하고만 의논하고 시연에겐 물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 등 억울하고 서운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니 어디에 그렇게 맺혀 있었던 건지 새록새록 밀려드는 서러움에 잠깐씩 숨을 골라야 했다. 시연으로서는 힘든 이야기였음에도 엄마의 반응은, 네가 그랬다면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았던 시연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너를 열심히 키웠고 그땐 그게 너를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정순이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내가 많이 보살펴줬을 뿐이야. 네 할머니도 그런 내게 고마워하셨지. 근데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니? 어릴 때부터 네가 지나치게 예민하긴 했지. 어쨌든 전부 널 위해 그런 거니 이제 잊어라."
자신은 아무 문제없는 좋은 부모였고, 예민한 시연이 별 걸 다 기억해서 트집을 잡고 있다는 말이었다. 시연은 기가 막혔다.
"나는 지금이라도 엄마가 내 감정을 인정해 주고 미안했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좋겠어." 시연은 말했다. 엄마의 사과 한 마디면 그동안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시연은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제발 미안하다고 말해줘, 제발', 시연은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끝내 미안하다는 말 없이 서울로 돌아갔다.
시연은 가슴에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 들려준 것만으로도 잘한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에 의미를 두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