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뜨는 별 Autumnstar 5
엄마가 몰래 자신의 방을 뒤져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 건 시연이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였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싸했다. '내가 또 뭘 잘못한 걸까', 시연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밥 먹고 이야기 좀 하자는 엄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씹던 밥알이 까끌까끌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알고 보니, 시연이 학교에 간 사이 엄마가 시연의 책상서랍 속에서 영화 잡지를 발견하고는 성적이 떨어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펄펄 뛰며 아빠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엄마의 말을 듣고 아빠도 몹시 화가 나있었다. 그날 밤 시연은 부모님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그리고 그날의 억울함은 두고두고 시연을 괴롭혔다. 시연은 한동안 부모님과 얼굴을 마주치는 걸 피했다.
엄마는 이따금씩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무엇이든 시연의 성적과 연결시키곤 했다. 시연이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가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듯 추측을 하고 거짓말도 잘한다는 걸 시연은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확신만 더해갈 뿐이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었다. 시연은 공부를 게을리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이 다가오면 도망치고만 싶었다. 열심히 공부한 만큼 점수가 잘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찼고, 시험 결과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매번 극에 달했다.
시험 기간이던 어느 날 아침 학교를 가려는데 갑자기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연은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시연이 시험 보기 싫어 꾀병을 부린다며 몹시 화를 냈고, 억지로라도 학교에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집을 나선 시연은 결국 2교시에 쓰러져 시험을 다 치르지 못하고 말았다.
학교 마친 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주말에 친구를 만나는 것도 모두 공부를 방해하는 시간 낭비라며 허락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시연은 거짓말을 해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도 지칠 땐 학교와 집만 오가는 답답한 시간들을 보냈다. 시험만 다가오면 심한 불안감에 시달렸지만, 시연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서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시연은 왜 내 책상을 뒤져 봤냐고 끝내 묻지 못했다. 엄마가 시연의 책상서랍을 뒤진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가족 누구에게도 시연의 사생활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에 간 사이 자신의 물건들이 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지 않았는지, 서랍 속 물건들이 왜 늘 뒤죽박죽이었는지 시연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일기장까지 엄마가 모두 읽어보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시연의 모든 걸 알고 싶었나 보았다. 그러나 딸과의 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몰래 엿보고 싶은 것 같았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삶을 궁금해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드라마도 보고 책도 읽는다. 그러나 엄마의 엿보기는 그런 것과 달리, 상대를 통제하기 위한 정보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딸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아니라, 염탐이고 폭력이었다.
엄마는 이 무렵부터 아빠에게 시연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이상한 아이라고 대놓고 시연을 비난했다. 자신은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라는 둥 시훈이랑은 너무 달라 정말 자신이 낳은 아이인지 의심스럽다는 둥 시연 때문에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다는 둥의 하소연을 했다. 어릴 때 예뻐해 주던 아빠의 눈길이 이제는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걸 시연이 느끼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학부모 회의나 참관 수업이 있는 날 시연의 엄마도 학교에 왔다. 그런데 시연의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좀 달랐다. 엄마는 시연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면 시연의 단점을 꼬집어 말하거나 자신이 시연 때문에 얼마나 힘든 엄마 노릇을 해야 하는지를 시시콜콜 고자질하듯 말했다. 시연과 친한 친구의 이름을 대며 그 아이랑 노느라 시연의 성적이 오르지 않으니 둘을 떨어뜨려놔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시연은 엄마가 학교에 다녀가고 나면 교무실로 불려 가 담임 선생님께 주의를 들어야 했다.
한 번은, 종례시간에 들어온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 누구라고는 안 밝히겠는데..." 하며 집안일을 전혀 돕지 않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이가 우리 반에 있는데 그러지 말자고 반 전체에게 말씀하셨다. 바로 시연이 며칠 전 엄마에게 핀잔을 들은 그대로였다. 아무도 그게 누군지 몰랐어도 담임 선생님은 자신의 이야기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에, 시연은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시연은 겉으로는 순탄하게 사춘기를 지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괴로웠다. 집에서 아싸로 살아가는 게 무엇보다 힘들었다. 동생 시훈은 마음대로 친구도 만나고 용돈도 타는데, 시연에게는 그런 것들이 어렵게 얻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땐 몰랐다, 한번 아웃사이더는 영원한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학교에서 돌아와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영화배우 판넬사진이 두 동강 나있는 걸 본 날, 시연은 방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울면서 생각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물어볼 거야, 나한테 왜 이랬는지 꼭 물어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