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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ug 16. 2024

소녀 1

혼자 뜨는 별 Autumnstar 4

몇 년 전 서울을 다니러 갔을 때 시연은 친정에서 며칠 지내게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놀다가 밤 11시 넘어 집에 왔는데, 그때까지 안 주무시고 기다리던 아빠가 왜 이렇게 늦게 다니냐 꾸지람을 했다. 마흔 넘어 맞은 야단에 옛날 일이 떠올라 시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릴 때 밖에 한번 나가 놀려면 집에 돌아올 시간을 몇 번이나 약속해야 했다. 친구 생일에 초대를 받으면 울고불고 통사정을 해야 겨우 허락을 얻어 친구 집에 갈 수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한 친구 생일에 초대를 받았다. 시연이 좋아하던 아이도 초대했으니 꼭 오라고 친구가 귀띔을 해 주었다. 생일 파티에 가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더니 친구 집이 너무 멀어 안 된다고 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생일 파티가 있던 일요일 아침 가족이 모두 늦잠을 자는 사이, 시연은 몰래 집을 빠져나와 친구 집에 갔다. 그리고 모든 걸 잊은 채 신나게 놀았다. 그날 집에 돌아온 시연에게 엄마는 앞으로 자신을 엄마라 부르지도 말고 집이 싫으면 나가 살라고 했다.

이 정도 막말이면 가족 중 누구라도 감싸거나 말리는 사람이 나서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연의 집은 달랐다. 아빠도 시훈도 모른 척하거나 심지어 엄마 편을 들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시연은 집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웃사이더로 살아가고 있었다. 힘 있는 사람의 눈밖에 나는 것처럼 서럽고 고달픈 일은 없다는 걸 시연은 일찌감치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혼줄이 나고도, 시연은 짜릿한 사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고, 자신이 잘못하는 게 아니라는 믿음이 마음 한 구석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이니 곱게 키우느라 그랬을 거다, 엄마가 얼마나 딸을 사랑하면 그리 세심하게 보살펴 주겠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시연은 하소연하던 입을 닫아버리곤 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아니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앞에서는 좋은 말만 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 할 때의 아슬아슬함과 걱정을 이겨내는 것도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걸, 시연은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게 되었다. 엄마가 되고, 아이가 자라 갈수록 시연은 어쩐 일인지 더욱 자신의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연은 중학교 입학 배치고사에서 1등을 하고 반장도 됐다. 어느 날 아빠가 거금을 주고 시연의 선물을 사 왔다. 시연의 손바닥 두 개를 합친 만한 아담하고 예쁜 라디오 카세트였다. 평소 무뚝뚝하던 아빠는 선물을 사다 주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시연은 아빠의 사랑과도 같은 라디오가 어디 흠집이라도 날까 봐 아끼고 또 아꼈다. 그러나 얼마 후 성적이 떨어지자 엄마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라디오를 빼앗아 갔다. 라디오를 듣느라 공부를 게을리했으니 성적이 오르면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라디오와 성적의 관계가 대체 무엇인지 시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성적이 떨어져 속상한 데다 아끼던 물건까지 빼앗겨야 했던 순간은 시연의 가슴에 깊은 멍자국으로 남았다. 엄마가 어쩌면 낳아준 엄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이모와 외삼촌이 놀리던 말이 농담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연은 솟아나는 서러움을 꿀꺽 삼켰다. 울고 싶지 않아서였다.

엄마가 장롱 안에 넣어두었다던 라디오는 그 후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시연은 다시는 그 라디오를 들을 수 없었다. 몇 달 후 외가에 간 시연은 작은 이모 방에서 자신의 것과 똑같이 생긴 라디오를 발견했다. 엄마에게 물어도 이모에게 물어도, 네 것이 아니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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