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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ug 14. 2024

아이 1

혼자 뜨는 별 Autumnstar 2

시연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동생 시훈이 태어난 무렵이다. 그때 어린 시연은 예감했던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엄마 아빠는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그래서 동생의 탄생은 적어도 시연에겐 전혀 기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들로 태어난 시훈은 순식간에 모두의 관심 한복판을 차지했다. 뭔가를 빼앗긴 느낌, 사탕이나 장난감이 아닌 그보다 더 중요한 뭔가를 놓쳐버린 느낌을 시연은 지금도 기억한다. 시연이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을 견뎌내야 했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시연은 겉으로는 명랑하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늘 외롭고 우울했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시연은 주위 어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나 여기 있다고, 시연은 마음속으로 고함을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 의하면 시훈은 늘 어질고 착한 아이, 시연은 늘 독하고 못된 아이였다. 시연은 자신이 엄마로부터 교묘하게 차별당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 차별이 자신이 딸이란 이유에서 온 건지, 엄마 말대로 독하고 못된 자신의 성격 탓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차별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시연은 생각했었다.


본격적으로 엄마의 미움을 사게 됐다고 느낀 사건은 시연이 세 살 되던 무렵 벌어졌다.

온 집안을 기어 다니며 손에 잡히는 물건은 죄다 입으로 가져가던 동생이 시연의 소꿉놀이 장난감 하나를 삼켰고, 그걸 발견한 아빠가 급하게 동생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목구멍 근처에 낙지 빨판처럼 붙어있던 장난감을 빼낸 것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시훈이 목숨을 잃었을 거란 의사의 말에, 엄마는 시연의 소꿉놀이 장난감을 모두 내다 버렸다. 세 살 아이 시연은 엄마에게서 "너 때문에 네 동생이 죽을 뻔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엄마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자신 때문에 사라질 뻔했다는 건 엄마에게서 미움받을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그날 이후 어른이 될 때까지 시연은 단 한 번도 소꿉놀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동생이 시연의 소꿉놀이 장난감을 삼켰던 그날 이후 소꿉놀이는 시연의 집에서 금기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시연에게는 소꿉놀이 장난감을 다시 사 달라고 조른 기억도, 하루아침에 사라진 소꿉놀이 장난감을 내놓으라고 떼를 쓴 기억도 없다. 대신, 자신이 뭔가 몹시 잘못한 것 같은 느낌에 오랫동안 짓눌려 있었다.

몇 년 전 시연은 북촌에 있는 한 박물관에서 진열장 안에 있는 소꿉놀이 장난감들을 보았다. "안녕! 우리 오랜만이지? 보고 싶었어." 작게 속삭이는 시연의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시연은 알록달록 야무진 소꿉놀이 장난감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시연은 그때 자신이 받았던 비난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는지 알았다. 그 일이 일어난 건 시연이 소꿉놀이 장난감을 갖고 놀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 그 일이 일어난 순간 동생은 부모님과 한 방에 있었으니 아기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시연은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죄책감을 비로소 벗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아빠가 시연만 집에 두고 나간 적이 있었다. 엄마는 어딘가 외출하고 집에 없을 때였다.

시연한테는 말 한마디 없이 아빠는 우는 동생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들으니, 분유를 먹던 동생이 왈칵 토하자 더럭 겁이 난 아빠가 동생을 안고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러 뛰어간 것이었다. 집에 세 살짜리 시연이 남겨져 있다는 건 까맣게 잊은 채.

"아빠! 아빠! 나도 데리고 가!" 사정을 알 리 없는 시연이 아무리 불러도 아빠를 빨아들인 현관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시연에게 든 무시무시한 느낌은 '아빠가 날 버렸구나'였다. 울고 있을 새가 없었다. 시연은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얇은 옷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시연은 추운 줄도 몰랐다. 캄캄한 아파트 복도 저 멀리 아빠의 뒷모습이 그렁그렁 눈물에 보였다가 지워졌다. "아빠! 아빠아!" 혀가 말려 뭉개진 말들이 울부짖음으로 변해 갔다. 그래도 아빠를 놓칠까 봐 눈앞의 어둠을 걷어내듯 팔을 휘저으며 시연은 뛰었다. 마침내 아빠가 복도 끝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시연은 아빠를 쫓아 그 집으로 들어갔다. 엉엉 울며 들어오는 시연을 본 아주머니가 신발도 못 신고 뛰어오느라 새까매진 시연의 발바닥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주머니는 시연의 이웃집 친구 보라의 엄마였다. 시연은 그제야 추위를 느꼈다. 벌벌 떠는 시연을 보라 엄마는 이불로 감싸 주었다. 자다 깬 보라도 시연을 감싼 이불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불속에서도 시연은 아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릴 때 시연은 엄마 아빠가 자신을 버릴까 봐 늘 불안했다. 엄마가 외가나 이웃에 시연을 자주 맡기는 편이었고, 그때마다 시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동생은 옆에 꼭 끼고 있으면서 자신만 맨날 여기저기 빙빙 돌리며 맡기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다.

엄마한테서 버림받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나이인 지금도 시연을 남겨놓고 가던, 아니 시연을 잊어버린 채 가던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할머니 옆에 누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숨죽여 울던 때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어쩌면 그 무엇보다 오래 남는 건 그때의 느낌일 거라고, 시연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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