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구름을 통과할 때
비 오는 날 짧은 치마를 입고 나갔다가 지나던 자동차가 튀기는 물벼락을 맞은 적이 있다.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던 나의 다리는 흙탕물 투성이가 되었다.
약속 시간을 미루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젖은 다리 때문에 너무 추웠다.
그날 이후 다시는 비 오는 날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았다.
흙탕물을 뒤집어썼던 게 창피해서도 기분 나빠서도 아니었다.
그날 몸에 느껴지던 한기가, 그 차가움이 싫어서였다.
그날 이후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에게 물벼락을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 나 혼자 신경 쓰고 연연할 때다.
그들이 사느라고 튀기는 물을 내가 오롯이 맞고 있는 것만 같다.
길에서 물벼락을 맞던 그날처럼 추워진다.
마음에서 느끼는 차가움은 몸이 느끼는 추위보다 훨씬 혹독하다.
그는 허물 같다.
내가 벗어놓고 온 허물.
그러니 이제 돌아갈 수도 예전과 똑같아질 수도 없다.
추워하지 않아도 된다.
서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마음도 벗을 수 있다면 허물과 함께 벗어놓고 싶다.
그리고 따뜻해지고 싶다.
다시 물벼락을 맞아도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닌 나는 춥지 않다.
"I love you to the moon and back."
언젠가 친구가 카드에 써서 준 말이다.
‘달에 갔다가 돌아오는 거리만큼 너를 사랑해'란 뜻이다.
처음 이 글을 보고 'back'을 달의 뒷면으로 이해한 나는 '달의 앞면과 뒷면만큼 너를 사랑해'로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듣고 나 혼자 딴소리를 할 때가 종종 있다. 가끔 사차원이라는 말도 듣는다. 이해력이 좀 부족한 것 같다고 나 스스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글을 읽거나 쓸 땐 나의 사차원 세계가 좀 편하게 느껴진다. 획일적으로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글의 세계에서 맘껏 헤엄치며 나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글의 해석도 그랬다.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그 미지의 세계처럼 나도 알 수 없을 만큼 너를 사랑해'라는 말로 받아들인 것이다.
최근에 우연히 이 말이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해석한 대로 쓰면, "I love you like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된다.
그런데, 대충 훑어보고 내 마음대로 이해한, 문법적으로 오류 있는 나의 해석이 왠지 더 마음에 든다.
사랑을 표현할 때, 많거나 큰 사랑보다는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 마음에 더 닿아온다.
많은 사랑보다 깊은 사랑이 더 하기 힘든 것 같다. 그래서 더 진짜 같다.
나 자신도 가늠하기 힘들 만큼 끝 간 데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이생망'은 아니겠지.
사랑받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어서 이 세상에 오래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