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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n 14. 2022

상처

빈 의자 1

S에게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란 말을 거듭할수록 멀어진다지. 그래서 의식적으로 '오랜만'이란 말을 하지 않았었어. 그 말을 하는 순간 우리가 멀어지는 중이란 걸 인정해버리는 것 같아서.

이젠 오랜만이라고 말해도 되겠지. 우린 정말 멀어져 버렸으니까.

힘들었어,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나한테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았다면 덜 힘들었을까. 이유를 알았다면 그럼 난 뭘 할 수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당신은 나의 우상이었지. 옷도 당신처럼 입고 싶었고, 헤어 스타일도 당신처럼 하고 싶었고, 심지어 말투도 닮고 싶었어.

그러나 당신으로부터 온 건 언제나 핀잔과 비웃음이었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땐 나를 보고 웃어 주다가도, 나와 단 둘이 있을 땐 차가웠던 당신.

우리 집에 깊숙이 스며들어 나를 소외시키던 당신.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지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

왜냐면 난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받는 게 어떤 건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을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아픔은 가슴에 남는다는 걸. 그리고 그 아픔이 결국 나 자신을 향한 미움의 시작이 된다는 걸 당신이 알 수 있을까.

당신의 계산법은 무엇이었을까. 늘 가까이 있었지만 투명한 막 사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었던 것 같은 당신.

어느 여름 내가 당신에게 갔을 때 마음껏 적의를 드러내던 당신이 나는 생소하지 않았어. 차라리 익숙했지.

그런데 나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을 통해 알았지, 사랑은 마치 습관과도 같다는 걸.

난 언제나 알고 싶었어, 당신이 왜 나를 사랑할 수 없었는지.

이제 당신의 마음을 말해줄 수 있을까?


S가 나에게

너를 처음 봤을 때 넌 아직 작고 여렸지. 그런 널 난 좋아할 수 없었어.

그때 내 마음은 나 자신도 가늠이 안 될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어. 내 마음은 못되고 삐딱한 것들에 최적화돼 있었지. 작고 예쁜 것들, 남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내 증오의 대상이었어.

나는 언제나 주목받고 싶었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 그 어느 한 조각도 네게 빼앗기는 건 견딜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싫었어.

너의 집 작은 귀퉁이라도 차지하고 어릴 때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나도 받고 싶었어. 그런데 이젠 알아, 그건 내 몫의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네가 나한테 왔던 그 여름 내 자존감은 날마다 바닥을 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내 생활에 비집고 들어온 네가 성가셨어. 널 오라고 했던 게 후회가 됐지.

네가 떠난 후 얼마간 마음이 복잡했어. 너와 함께 지낸 시간들의 여파가 곧 몰려올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입을 다물어 버렸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

그렇게 집착하더니 왜 갑자기 떠났냐고? 그게 내 계산법이야. 사랑받지 못하면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어. 마음이 늘 떠다니지, 구름처럼.

너도 그래?


다시 S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사랑을 바라는 마음은 절실하고 채워지지 않는 마음은 쓸쓸하지.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신이 내 마음을 받아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신을 사랑해 주는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면 당신의 황폐함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을 거야. 사랑받기를 바랐다고 말하지만, 사실 당신은 그 누구의 사랑도 거부하고 있었던 거야. 그때 당신은 사랑보다 미움과 불평 속에서 사는 게 훨씬 편했을 테니까.

나도 사랑에 늘 목말랐지. 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황폐한 마음을 나에게 투사했던 거와 달리, 난 내 아픈 마음을 깊숙이 묻어 두었지.

이제 그걸 꺼내어 보듬으려고 해.

당신이 미워하고 소외시킨 사람은 당신의 인생에서  하나였기를 바랄 뿐이야.


내가 나에게

많이 아팠지?

그때 거기 네가 있었을 뿐, 네 잘못으로 사랑받지 못했다고 이제 더는 생각하지 마.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이제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그러니 더는 아파하지 마.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고마워, 그동안 버텨줘서.

고마워, 그동안 살아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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