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러 가기

by Anna Lee

"이웃집 순이 울 엄마 보고 할매라고 불렀다.

잠이 안 온다 내일 아침 먹고 따지러 가야 하겠다"

어릴 때 흥얼대던 동요의 가사다. 언제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동안 즐겨 불렀었다.

가사가 여느 동요처럼 곱거나 예쁘지 않다. 그런데 왠지 끌린다. "따지러 가야 하겠다" 대목에선 팔까지 흔들며 격하게 부르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체구가 작았던 나는 얼핏 보면 연약해 보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보호본능 같은 걸 불러일으켰을 게 분명하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같은 또래 친구들도 나를 항상 보살펴 주려 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생일이 저만치 뒤인 나를 친구들이 마치 동생 보듯 도와주었다.

그러나 겉으로 약해 보이던 나는 의외로 괄괄함도 갖고 있었다. 몸싸움은 몰라도 말로는 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랑 모여 놀 땐 나름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곤 했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모여 학교놀이를 했다.

나는 그날도 선생님이 되어 말 안 듣는 아이들을 꾸중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놀이라는 걸 잊었는지 갑자기 발끈했다. 꾸중 듣는 시늉을 해야 했던 그 아이는 "왜, 뭐, 어쩌라고!" 이러면서 때릴 듯 내게 확 다가왔다. 순간 놀란 나는 그 아이를 밀쳤고, 내가 그럴 줄 전혀 예상 못했던 그 아이는 무방비 상태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필 그 아이가 넘어진 곳에 함석판 같은 게 있어 "쾅"하고 매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모두 그 소리에 놀라 움찔한 순간, 넘어진 아이가 왕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일으켜 주려던 다른 아이의 팔을 뿌리치고 울면서 집으로 갔다. 한창 재미있었을 학교놀이는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상하게 뿌듯했다. '나 이긴 거야, 지금?' 몸싸움으로 명함도 못 내밀던 내가 다른 아이를 울리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승리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엉덩방아를 찧었던 아이의 엄마가 우리 집에 따지러 온 것이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잔뜩 상기된 얼굴의 아주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아주머니 뒤로 좀 전에 울던 아이의 눈물 콧물로 떡진 얼굴도 보였다.

영문을 몰라 처음에 밀리던 엄마도 곧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고, 두 아주머니는 열띤 그러나 결코 아름답지 않은 고성을 장시간 나누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어느새 우리 집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그날 이후 그 아이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같이 놀았지만, 엄마들끼리는 길에서 마주쳐도 못 본 척했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우리 집은 이사를 갔다.

이사 간 동네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 중 하나가 J였다. 엄마들끼리도 친해서 우리는 자주 같이 놀았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J와는 가끔 다투었다. 대부분은 나와 잘 맞았지만, J는 짜증이 많아 징징대길 잘했다. 한 번씩 말다툼을 하긴 했지만, 그러고도 다음에 만나면 잘 놀곤 했다.


어느 날, 우리가 살던 아파트 앞마당에서 놀다가 J와 언쟁이 붙었다. 무슨 일로 그랬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꽤 오래 다투었다. 말싸움으로 동네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 아닌가. 결국 내 공세에 밀린 J는 씩씩대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더니 잠시 후 고학년 언니 Y를 데리고 왔다. Y는 나랑 친하지는 않았지만 한 아파트에 살아서 오다가다 마주치곤 했다.

Y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너야? J 못살게 군 게 너야?" 하며 눈을 부릅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주눅이 드는데 Y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겁이 났지만 화도 났다. Y의 옆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J가 못 견디게 미웠다. 나한테 밀리자 학년이 높은 Y에게 나를 혼내 달라고 부탁한 게 분명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대답을 해보라고! 너야?" 내가 가만히 있자 Y가 한번 더 소리쳤다.

"그래, 나다, 이 깡패야!" 나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애초 Y와 싸운 것도 아니고 딱히 할 말도 없어 그 순간 느껴진 대로 말했을 뿐이다.

"뭐?" Y가 이 외마디 소리와 함께 내 허벅지를 걷어찼다.

세게 차인 것도 아니었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감정이 내 안에서 복잡하게 엉겼다. 배신감, 소외감, 수치심, 서러움 같은 것들이 내 눈 언저리로 뜨겁게 몰려들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으로 발을 돌렸다.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는 "가자!" 하더니 내 손을 끌고 Y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옛날 그 어느 날과 비슷한 풍경이 다시 펼쳐졌다. 이번엔 입장이 바뀌었을 뿐이다.

엄마가 집에 돌아와 나를 위로해 주진 않았지만, 내 편이 되어 한바탕 싸워준 게 고마웠다. 약간은 통쾌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J의 엄마와 우리 엄마는 여전히 잘 지냈지만, 나와 J는 더 이상 같이 놀지 않았다.


이웃과 문제가 생기면 경찰을 부르는 나라에 와 살고 있는 지금, 문득 그 옛날 일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이웃과 따지고 싸우던 그 일들마저 정겹게 느껴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모두 내 그리움 탓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xpgy8cA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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