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by Anna Lee

깜짝 선물을 받았다.

BTS의 새 앨범 <PROOF>. 보낸 사람은 '아미' 둘째다.

블랙 표지에 은장 방탄 로고가 새겨진 앨범 커버가 멋지다. 제이홉의 포토 카드도 나를 반긴다. 팀의 숨은 리더 역할을 야무지게 해내는 성격 좋은 제이홉, 그의 사진이 내게 와서 기분이 좋다. 손에 닿는 감촉이 마치 실크처럼 매끄러운 포장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CD 세 장과 사진집, 그리고 데뷔 후 9년 동안의 그들의 발자취가 담긴 예쁜 카드도 들어있다. 재킷 안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도 향긋하다.

둘째는 이 앨범을 너무나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겐 CD 플레이어가 없다. 옛날 사람인 내가 갖고 있다. 둘째가 내게 보낸, 나를 위한 또 자신을 위한 선물일 것이다.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내가 잘 보관하고 있을 테니 여기 오면 들어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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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받았던 선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으라면 단연 '과자 종합 선물 세트'다.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에 친척들이 선물해 준 종합 선물 세트는 매우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커다란 상자를 열면 그 안에 과자, 사탕, 양갱, 껌 등 다양한 간식이 들어 있었다. 알록달록한 박스에서 풍겨 나오던 달착지근한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 동생이랑 과자를 하나씩 바꿔 먹기도 하고 그러다 싸우기도 하면서 아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download.jpeg 사진 출처 news.v.daum.net


빨간 장화 모양의 플라스틱 통에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 들어있던 선물도 생각난다.

크리스마스에 고모한테서 받았던 초콜릿 상자도 잊을 수가 없다.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트리, 루돌프 모양의 초콜릿들이 상자 가득 들어있었다.

이런 즐거운 기억들이 모여, 어려서 아직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뭔지 몰랐을 때도 사람들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뻐하는 날이란 걸 알았다.


나는 적어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아파트여서 굴뚝은 없었지만, 그래도 집 어딘가로 산타 할아버지가 꼭 들어올 거라 믿었다.

산타클로스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게 된 후로도, 나는 산타 할아버지를 고집스럽게 기다렸다. 산타 할아버지가 곧 부모님이라는 말을 친구들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나 아빠가 혹시 선물을 놔두지 않았을까 몇 번씩 자다 깨어 머리맡을 더듬어 보곤 했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가 내 머리맡에 선물을 놔두고 가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한테 선물을 받는 것도 크게 좋아하시지 않는 듯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한 친구와 부모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드리기로 하고 용돈을 모았다. 아빠에겐 빙 크로스비(Bing Crosby) 크리스마스 캐럴 LP 판을, 엄마에겐 지갑과 손수건을 선물했다.

아빠는 내 선물을 보고 고맙다고도 좋다고도 안 하셨다. 대신, LP 판을 바로 턴테이블에 올리고 음악을 들으셨다. 입꼬리가 올라간 게 다 보이는데도, 음악의 열정 팬인 아빠가 선물이 싫을 리 없는데도 표정 관리를 하셨다. 그냥 좋다고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도 표현에 익숙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엄마는 한숨을 푹 쉬며 돈 좀 아껴 쓰라고 핀잔을 주었다.


jake-goossen-d_h3M-iJnYE-unsplash.jpg 사진 출처 Unsplash


다음날 친구를 만나 부모님의 반응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굉장히 좋아하시던데. 우리 딸이 벌써 커서 선물까지 할 줄 안다며 엄마는 막 울려고 하셨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풀이 죽었다. 우리 엄마도 친구의 엄마처럼 좋아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어딘가 나의 진짜 엄마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중학교 입학 배치고사에서 나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거금을 주고 내 선물을 사 오셨다. 산요(Sanyo) 라디오 카세트였다. 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만한 크기로 무척 아담하고 예뻤다. 라디오와 카세트 모두 들을 수 있고 녹음까지 할 수 있었다. 생명체가 아닌 것만 빼고 모든 게 완벽했다.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던 아빠가 실은 나를 사랑하셨구나 느껴졌다. 나는 마치 아빠의 사랑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김세원의 영화 음악실'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프로그램도 그 라디오로 들었다.

그렇게 행복한 몇 달이 지났다. 시험 성적이 전달에 비해 떨어지자, 아빠가 사 온 라디오를 처음부터 못마땅해하던 엄마는 라디오 압수를 선포했다. 성적이 떨어진 건 라디오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니 성적이 오르면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후 다시는 그 라디오를 들을 수 없었다. 한 번 떨어진 성적을 다시 올리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엄마가 장롱 안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던 라디오는 다시 꺼냈을 때 웬일인지 먹통이 되어 있었다.

수리를 해서 다시 그 라디오를 들은 기억은 없다. 그 대신 내 기억에 남은 건 억울하게 라디오를 빼앗겼던 순간이다. 성적이 떨어져 속상했던 나는 위로나 격려 대신 아끼던 물건까지 빼앗겨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라디오와 성적의 상관관계가 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엄마는 정말 새엄마가 맞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몇 년 전 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넉 달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때 엄마에게 라디오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정말 힘들었다고, 상처가 되어 잊히지 않는다고. 그런데 엄마는 그 일을 전혀 기억을 못 하셨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선물을 받으면 좋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이 내게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 고마워서다.

나를 생각하고 내가 뭘 좋아할까 궁리하고 나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그의 시간과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느껴진다. 누군가 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게 신기하고 고맙다. 그 사람에게, 또는 그의 마음을 배워 또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시간과 노력 또한 아낌없이 쓰고 싶어 진다.

그런 착한 사이클이 내겐 소소한 행복이다.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선물 같은 오늘을 나는 또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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