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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18. 2022

책을 펼치면

책장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낡은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꺼내어 펼쳐본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뭔가 톡 떨어진다. 붉은 장미꽃잎이었다. 중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품으로 받은 시집이니 장미꽃잎도 같은 세월을 시집과 함께해 왔을 것이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도 중학교 때 읽은 책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독일인의 사랑>은 모두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주고받은 책이다. 각자의 책꽂이에 꽂혀있다 결혼과 함께 합쳐진 셈이다.



재작년 이사를 하며 집에 있던 책들을 대폭 정리했다. 전집으로 사놓고 미국으로 건너오는 바람에 거의 펼쳐보지 못한 아이들의 동화책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새 주인을 찾아주었다. 책을 픽업하러 온 아기 엄마를 도와 트렁크에 싣는 동안 함께 온 아이는 벌써 좋아라 책들을 펼쳐보고 있었다.

이곳에 와 읽었던 책 대부분은 딸아이들이 가져갔다. 몇 권의 전공 책들과 서울에 갈 때마다 샀던 베스트셀러들이 내게 남은 전부다. 그들 틈에서 내 오래된 책들은 내가 펼쳐주길 기다리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듯하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랜 낱장들, 오래 묵은 종이 냄새,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한자들이 생경스럽다. 글자체도 레이아웃도 요즘 나오는 책들에 비하면 좁고 답답하다. 세련되고 빠닥빠닥한 촉감을 가진 요즘 책들에 비하면 촌스럽고 볼품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들을 버리지 못하고 이사 때마다 끌고 다닌다. 그리고 먼지를 닦아 책장에 모신다.


어릴 때 나보다 열 살은 많은 외삼촌, 이모와 어울리다 보니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읽었던 그림책들, 아빠가 사들고 오셨던 어린이 잡지 <꿈나라>, <어깨동무>가 생각난다. 가끔씩 특별부록으로 딸려 나오던 학용품이나 만들기 장난감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기도 했다. 막상 만들다 보면 설명서와 맞지 않아 실망했던 적도 많지만 말이다.

이모들, 삼촌들이 보던 강소천 전집을 물려받아 초등학교 6년 내내 읽고 또 읽었다.


https://brunch.co.kr/@annalee1340/5


중학교 때의 독서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건 바로 '삼중당 문고'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클 뿐인 책이라 어디나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삼중당 문고의 책들을 하나씩 모으는 재미에 책을 읽기도 했다. 펄벅의 <대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카뮈의 <이방인>,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같은 고전들과 심훈의 <상록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김유정의 <소낙비> 등도 그때 읽었다. 크기는 꼬맹이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은 방대했다.

요즘 '레트로 감성'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내겐 감성을 떠나 지난 삶의 한 토막이 되어있다. 그리고 작은 편린들은 지금까지 남아 기억을 만지고 삶의 취향을 만들어낸다.

학년이 올라가고 대학입시가 가까워질수록 기억에 남는 책이 줄었다. 입시에 도움 되는 책들을 우선적으로 읽느라, 정작 내가 읽고 싶던 책들을 선택할 기회가 희박해져서였을 것이다. 감수성이 흘러넘치던 그때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긴 시간 집중이 어려워 책 읽는 속도가 느린 나는, 게다가 정독을 하는 편이어서 지금도 책 한 권을 끝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런 만큼 여운도 길게 남는 편이다. 책 하나를 다 읽고 나면 다음 책을 얼른 시작하지 못하는 것도 먼저 읽은 책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느릿느릿 책을 읽고 있다.


오래된 책들은 나의 기억과도 같다. 새로운 노래들에 밀려 더 이상 안 듣게 된 노래와도 같다. 한동안 안 듣던 노래를 소환해 들으면 그 노래를 들을 때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듯, 옛날 책들을 펼쳐보면 책 갈피갈피 그때의 내가 있다. 빛바랜 페이지에서, 밑줄 그은 흔적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 아파했던 것, 사랑했던 것들이 보인다.

책은 예전 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가 지금의 내게 돌려준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 - 나의 오래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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