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이 이끈, 또 다른 예술 세계

by 김리온

2013년, 뮤지컬 <투모로우 모닝>의 무대에 오를 배우들의 웨딩슈즈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결혼과 이혼을 앞둔 두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라이선스 초연 뮤지컬이었고, 제작사는 신발 디자인에도 공을 들였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무대 공연용 신발을 의뢰받은 건 처음이었다.

배우의 신발을 만든다는 건 단순히 예쁜 구두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어떤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딛고 걷는지를 상상해야 하고, 매일 라이브로 반복되는 공연에서도 편안해야 하며, 그 발끝까지 서사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

신발을 디자인할 땐 늘 신는 사람의 상황과 용도, 스타일을 고려하지만, 오직 무대 위, 정해진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의 신발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나 역시 극과 캐릭터에 몰입해 신발을 만들었고, 내가 만든 신발을 신고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는 순간은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막상 막이 오르고 나니, 신발보다는 어느새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든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릴 적부터 전시를 보러 미술관에 가는 일은 익숙했지만, 공연은 어쩌다 한 번, 특별한 날의 이벤트처럼 느껴졌었다.

이 뮤지컬에 참여하게 된 일은 그런 나에게 작지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무대 뒤에서 배우들을 보고, 그들이 입고 신는 모든 것에 서사가 깃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공연이라는 장르 자체가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 뒤로 공연장을 자주 찾게 되었고, 그 안에서 또 다른 감동과 예술의 결을 발견해 갔다.

배우들에게 받은 인상과 감정은 나의 감상 방식 자체를 바꾸어놓았고, 예술을 받아들이는 스펙트럼이 서서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신발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공연을 10년 넘게 보아왔다.


<투모로우 모닝>에서 처음 만난 임강희 배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연기는 처음부터 인상적이었고, 그 뒤로도 출연작을 꾸준히 챙겨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임강희 배우가 나온다면 꼭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리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그녀의 작품은 거의 빠짐없이 보았고, 그 감상은 내 안에 하나의 연극 연대기처럼 쌓였다.


매번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그녀를 보며, 한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인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최근, 연극 <대학살의 신>을 보았다.

야스미나 레자의 작품으로, 현대 사회의 위선과 문명이라는 가면을 풍자하는 강렬한 극이다.

날카롭고도 치밀한 대사들 속에서 네 인물이 팽팽하게 맞서는 80분 동안, 그녀는 또 다른 얼굴로 나를 압도했다.

특히 임강희 배우가 연기한 인물은 겉으로는 점잖고 교양 있어 보이지만, 대화가 흐트러지고 감정이 격해질수록 점점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 미묘한 균열을 얼마나 정교하게 표현하던지, 웃음 속에 숨은 불편함이 아찔할 정도였고, 눈을 뗄 수 없었다.

극을 보는 내내 ‘문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덧없고 얇은지 실감하게 됐다.

예의를 지키고, 품격을 유지하겠다는 태도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진다.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정말 인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문명은 본성을 억제하는가, 아니면 그 위에 그저 덮어둔 것일까.

<대학살의 신>은 그 질문을 유쾌하게, 동시에 잔인할 만큼 정직하게 던지는 연극이었다.

네 인물이 차례로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 역시 내 안의 어떤 민낯과 마주하게 되었다.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은 언제나 우스꽝스럽지만, 그만큼 진실하다.

임강희 배우가 무대 위에 있었기에, 나는 더 집중해서 극의 결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녀의 감정이 흘러가는 방향을 좇다 보니, 작품의 뉘앙스가 더 선명해졌고,

그렇게 연극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 훨씬 더 입체적인 체험이 되었다.

익숙한 배우가 낯선 인물을 통해 던지는 질문들.

그 안에서 나 역시 어떤 감정을 꺼내보고, 내 안의 생각을 다시 짚게 되었다.

처음엔 발끝에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그녀의 신발을 디자인하면서 시작된 호기심이,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감상이 되었고,

이제는 공연을 더 깊이 보고 즐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예술가와 관객의 관계는 참 오래도 이어질 수 있구나 싶다.

그리고 누군가의 꾸준한 연기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내 안의 감상도 조금씩 성장하게 만든다.

지금 이 무대 위에서, 나는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응원하고 있다.

그녀의 연기뿐 아니라, 내가 예술을 더 좋아하게 된 그 시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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