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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n 28. 2020

아파트에 살면서 겪은 후기 2

더불어 사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내 집 마련은 어제오늘의 꿈이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오빠는 놀이터가 있는 H아파트에서 흙장난을 하다가 H아파트 경비원한테 쫓겨났다고 한다. 그때 유치원에 다니던 오빠는 놀이터에서 땅을 파니 그 안에서 물이 나와서 계속 팠다고 한다. (지하수인가?) 그때 경비원은 오빠에게


너네 아파트도 아닌데 여기 오지 마!


라고 얘기를 했다고 한다.


오빠는 그 얘기를 당시 27살이었던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그대로 전했다. 그때 엄마는 엄청 서러웠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 없는 그곳은 놀이터가 없는 빌라였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3년 뒤 아빠는 H로 발령이 나서 우리는 이사를 했다. 그때는 이삿짐도 별로 없었다. H에 있던 관사는 그 당시 H에서 최초로 건설된 4층짜리 아파트였다. 실제로 H초등학교 학생들은 관사까지 와서 아파트를 구경하고 갔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니 부모님 직업과 주소를 전부 적어서 내라고 했다. 그때 내 짝꿍 포함해서 친구들 부모님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셨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입는 옷은 전부 사촌 언니의 사촌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옷이었다. 최상위 엘리트 집안이었던 그 언니는 영국 버버리의 옷을 입고 다녔다. 그 옷이 작아지면 나의 사촌 언니에게 물려주고 사촌언니가 입다가 작아지면 그 옷이 나한테 왔다. 큰이모는 나에게 새 옷을 많이 사주셨지만, 헌 옷을 주실 때면 엄청 미안해하셨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버버리의 옷을 입었다) 옷은 깨끗하게 관리가 된 채로 나한테 왔기 때문에 그 옷은 거의 새것이었다. 그 옷을 입고 학교에 다니니 초등학교 1~3학년까지 엄마는 담임 선생님들로부터 촌지의 요구를 끊임없이 받았다. 어느 순간 내 자리는 맨 앞자리에서 맨 뒷자리 청소함 바로 앞으로 이유도 없이 밀려나게 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는 또 한 번의 발령을 받아서 이번에는 I로 이사를 왔다. 그곳에는 이미 고층 아파트가 많은 곳이었다. 관사 주변에는 일제 시대 때 건설된 수로와 밭 그리고 **가든만 있었다. 아빠와 나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주변을 자주 돌아다녔다. 그 당시 우리는 차가 없었다. 그래도 관사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됐다. H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서 시내에서 다시 초등학교까지 걸어서 가야 했다. 8~10세까지 거의 1시간이 넘게 걸리던 통학길을 개근하다 보니 11세에 I에서 초등학교 가는 30분의 길은 매우 무난했다. 아빠는 초등학교 뒤편에 있던 아파트들을 나와 함께 둘러봤다. 관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고층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그중에 아빠는 유독 한 아파트를 마음에 들어하셨다. 이름은 지금도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 브랜드인 S아파트였다. 아빠는 S아파트가 I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교실에서 S아파트에 산다는 친구를 보면 엄청나게 부자인 줄 알았다.


IMF가 터지고 나서 우리 집 형편은 오히려 나아졌다. 신문을 매일 아침 정독하시는 외할머니께서는 아빠의 직업이 안정적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그때가 외할머니께서 아빠를 처음으로 칭찬하셨던 때였을거다. 그리고 몇 년 뒤 부모님은 I에 신축 아파트를 살 정도의 돈을 모으셨다. 엄마는 I에 아파트를 사자고 말씀을 하셨지만 아빠는 I에다가 아파트를 사는 걸로 돈을 쓰지 않겠다고 하셨다. 10여 년 후 정년퇴직을 앞두셨던 아빠는 돈을 모으는 것에 공부를 많이 하시고 계획을 철저히 세우셨다. 어쩌다 보니 오빠와 나는 대학을 비슷한 시기에 가게 됐다. 아들 성공에 목을 맸던 우리 엄마는 내 예상과는 달리 오빠를 지방에 두고 나를 서울로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아빠는 당시 내가 서울로 가는 비용까지 저금하고 싶어 하셨다. 대학 4년 동안 내 등록금과 원룸 전세비용 그리고 생활비까지 꼼꼼하게 다 따져보셨다. 서울에서 4년 동안 생활하면서 아빠가 다달이 나에게 주시는 생활비가 모자랄 때가 많았다. 그러면 엄마가 평소에 아껴둔 생활비를 나한테 넉넉히 보내 주셨다.


나는 토익 시험을 보러 갈 때가 대학 4년 중에서 가장 떨렸다. 내가 토익 시험을 보러 갈 당시에 시험비용이 3만 원인가 했었던 것 같다. 종로에서 영어 회화수업만 듣고 있었고, 수업료가 꽤 비쌌기 때문에 토익 학원은 따로 다닐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한 번에 목표 점수가 나와야 또 시험을 치르느라고 돈을 쓰지 않기 때문에 바짝 긴장해서 시험을 봤던 기억이 난다. 운이 좋게 나는 대학 2학년 때 토익 시험 1번을 보고 시험 만기가 돼서 4학년 졸업 직전에 취업 원서를 내려고 토익 시험을 1번 더 보게 됐다.


내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종종 서울에 놀러 오셨다. 우리 셋은 아빠가 다니던 대학교와 하숙집도 둘러봤다. 그리고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직접 가서 단지를 걸어보고 주변 환경을 살폈다. 정년퇴직 후 제주도에서 낚시를 하며 살겠다던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서울로 눈을 돌렸다. 내가 3학년 때 아빠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분양을 받으셨다. 그리고 내가 학교 수업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서 나와 함께 안국동에 있는 모델하우스에 가서 계약금을 지불하셨다.


당시 내 원룸에서 가까이 있던 그 아파트 공사 현장을 아빠는 서울에 오실 때마다 나랑 같이 가셔서 둘러보셨다.


아빠, 정말 내년이라는 시간이 와서 우리가 이 아파트에 입주하게 될까요? 아직 18층도 다 안 지어졌는데?

금방 지을 거야. 그리고 주변 환경도 금방 좋아질 거고...

우리가 서울의 아파트에 살게 될 줄 몰랐네요. 그럼 이모부보다 우리가 훨씬 나은 거 아닌가요?

하하하 뭐 그럴 수도 있고... 그쪽은 진작 강남에라도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형편인데 왜 안 샀나 모르겠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서 아파트는 완공이 됐고 아빠의 정년퇴직 전까지 나 혼자 직장을 다니며 그 아파트에 살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평수를 좀 더 넓힌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살고 있다.


관사에서 살던 평수보다 정확히 2배 크기의 집에서 살기까지의 과정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보금자리가 요즘 들어 시끌시끌하다.


외부인 출입금지를 내세워서 아파트 내에서 강하게 출입을 통제할 예정인가 보다.

내가 사는 집 주변은 전부 재개발 예정 지역이다. 그리고 내 방에서 보이는 이웃 아파트는 10년도 더 된 오래된 아파트이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과 주민들이 우리 집 아파트 단지에 와서 소란 아닌 소란을 자주 피운다.


아파트에 입주해서 6개월도 채 안돼서 심어놓은 꽃과 전구가 전부 뽑혀나갔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내 분수대에 아이들이 들어가서 놀면서 난장판이 됐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신식 놀이터에 아이들이 큰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서 놀다 보니 우리 관리비에서 놀이터 수리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되는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한 아이를 치고 달아나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입주민이었던 그 아이의 부모는 화가 잔뜩 나서 자전거를 탄 그 아이에게 화를 냈고 그 아이는 어른에게 욕과 발길질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가 경찰까지 불렀는데 그 아이는 경찰한테까지 발길질과 욕을 했다고 한다.


개를 데리고 와서 대소변을 보고 뒤처리도 하지 않고 나가는 외부인들 때문에 저녁 시간에 창 밖에서 입주민과 외부인이 다투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리고 검은 봉지를 가지고 와서 단지 내에 있는 화살나무나 열매가 달린 나무 위에 올라가서 따 가다 보니 나무가 손상이 되고 1층에 사는 사람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선선한 여름 저녁에는 단지 내에서 돗자리를 깔고 소주를 까는 사람들 때문에 아파트가 몸살을 앓고 있다.


7월에는 아파트 내에서 뭔가 대책을 내려고 준비 중인 것 같다. 나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싶지만 입주민 회의 같은 것을 평일에 하다 보니 내가 참석하거나 관심을 갖기가 힘들다. 그리고 나는 단지를 크게 한 바퀴 둘러보는 게 1달에 고작 3번 될까 말까이기 때문에 문제점이 피부로 크게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퇴근할 때 보이는 화단에 어느 날부터 전부 시커먼 줄이 쳐져서 "출입금지, 개 대소변 금지"라고 쓰여 있는 그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20대 초반에 원룸에서 혼자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니 내 꿈은 단 하나였다. 돈 많이 벌어서 큰 베란다가 있고 안전한 곳에서 사과나무를 키우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는 거였다. 요즘 들어 이 꿈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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