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잔은 본드로 수습된 후 신발장 빈 공간에 보관 중이다
그 날 오전에는 시청역 근처에서 회의가 있어서 평소보다 아침에 여유가 있었다. 엄마가 며칠 전에 산 예쁜 잔에다가 커피를 두 잔 내려서 마시고 맨손으로 잔을 소중히 씻은 후 컵 선반 위에다가 놨다.
이제 막 출근을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부엌으로 가 봤더니 몇 분 사이에 그 잔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엄마는 본인이 사용하던 컵을 씻고 손이 미끄러져서 컵 선반에 그 컵을 평소보다 세게 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반동으로 내가 사용한 그 잔이 개수대로 떨어지면서 잔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고 몇 군데가 조각이 났다.
엄마는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그 잔을 씻어서 왜 거기다가 뒀냐고 나를 사정없이 추궁하셨다. 엄마는 엄마 본인한테도 화가 났지만 나한테도 화가 잔뜩 나셨다. 어찌나 충격이 크셨던지 단 하루도 안 빠지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를 배웅을 하시던 분이 그 날은 코빼기도 안 비치셨다. 그 잔은 평소에 쉽게 만나기 어려우신 분이었고, 가격은 내 하루 일당 정도였다.
회의를 가서도 계속 찝찝했다. 보통 출근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은 게 나다운 모습인데 그 날은 회사가 훨씬 편했다. 회사에서는 내가 뭘 깨트려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주말 아침에 그 사달이 났다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했을 거다. 카톡을 자주 주고받는 엄마한테서 그 날은 카톡이 한 번도 안 왔다. 나야 밖에 나와있으니 일을 하면서 잠깐 동안이라도 그 잔을 잊을 수 있겠지만 엄마는 부엌에다가 깨진 파편까지 전부 모셔두고 하루 종일 마음 아파하실 거다.
마음이 허해서 그런지 회의를 마치고 점심을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아르바이트 생으로 보이던 뿔테를 쓴 어린 남자 직원이 내가 정말 일행이 없는지 재차 확인을 했다. 직원이 봐도 양이 많아 보였나 보다. 몇 년 전에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에 이직이 실패한 이후로도 2인분 씩은 먹었던 거 같다. 연어 집에 가서도 연어덮밥에 어묵우동을 곁들어서 먹었다. 김밥집에 가도 김밥 2줄에 푸라면 하나를 시켜서 먹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몇 년 어리고 부끄러움을 알았는지 서빙하는 직원한테 일행이 곧 올 거라고 거짓말하고 앞에 의미 없는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해 놓고 혼자 다 먹었다.
점심 먹고 사무실로 복귀해서 밀린 일을 처리한 후에 퇴근했다. 현관문 여는 소리에 항상 뛰어나오시던 엄마를 그 날 저녁에는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를 반겨주셨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셨는지 엄마는 그 컵 얘기만 빼고 평소에 하지 않았던 얘기를 나랑 나눴다.
앞으로 퇴사의 욕구가 치솟을 때 이 잔 값을 생각하면서 하루씩 하루씩 더 버텨나가야겠다.
영국 퀸 앤 Royal Bridal Gown 잔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혼인식 웨딩드레스를 모티브로 1949년 한 해만 만들어졌다. 엘리자베스 여왕 웨딩드레스의 꽃, 별 그리고 핑크빛 리본이 그려져 있는 잔이다. 1년 동안만 생산됐기 때문에 한정판이라서 구하기 쉽지 않고 부르는 게 값이다. 70년 된 한정판 잔이 우리 집에서 깨트려졌으니 앞으로 더 가치가 올라가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