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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l 21. 2020

E 이야기

잘 가 그동안 수고했어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남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것에도 신경이 거슬릴 때가 있다.


동료나 후배님들이 일을 하다가 바시락 거리면서 끊임없이 먹어대는 소리가 거슬릴 때가 있고, 타 부서 팀장의 손톱 깎는 소리에 참다 참다 자리에서 일어난 적도 있다. 게다가 남들에게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고 낮은 목소리로 개인 통화를 길게 하는 후배님의 소리에 업무 집중을 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상사의 알 수 없는 감정 기복이나,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서까지 회의가 끝나지 않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조직에서나 이 정도는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많지 않은 인원들이 같은 공간 안에서 사소한 예의를 지켜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E가 우리 부서에 입사했다.

E는 형식적인 면접을 보고 들어온 사람이었다. 아직까지 이 사회에는 공정한 채용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E도 공정한 채용인 척 형식을 거친 것일 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E와 같은 날에 면접을 보려고 정장을 입고 시간을 내서 참석한 친구들이 나는 안쓰러웠다. 더욱이 이런 식의 관행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에 화가 나기도 했다. 어쩌면 나도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이런 식의 피해를 받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오랜 시간 체류하면서 자녀를 국제학교에 보낸 부모들은 대부분 본인의 자녀들이 한국에 있는 회사에서도 특히 글로벌 사업부서에서 일을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글로벌 사업부에는 나 같은 흙수저와 아직도 엄카를 들고 다니는 금수저가 항상 섞여 있었다.


E 역시 해외에서 초, 중, 고를 졸업했고 한국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다. 우리 부서에서 E는 다이아몬드가 하나 박힌 금수저였다. 사는 곳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파트의 60평 대에 가정부를 두고 살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 면접을 보러 올 때는 BMW를 타고 와서 경비원한테 인사까지 받고 회사로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고 E는 우리 부서에 적응을 잘했다. 현실 파악을 잘하는 친구였고, 눈치가 빨랐다. 쓸데없이 눈치가 너무 빠르다 보니 혼자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많아 보였다. 그러나 E는 본인의 앞가림을 잘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싹싹함이 있어서 좋았다. E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다른 쪽 업무가 본인에게 더 낫다고 판단을 하면 그 기회를 때에 맞춰서 잡을 줄도 아는 친구였다.


E는 나보다 5살 어린 후배님이었지만 그런 E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았다. 꾸준히 노력하고 도전하는 E를 옆에서 지켜보며 나도 자극을 받아서 독학하던 스페인어를 학원까지 다니게 됐다. 덕분에 나도 E처럼 뭔가를 독하게 해보고 싶어서 스페인어 초급~고급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하지만 그런 E와 내가 맞지 않는 치명적인 한 부분이 있었다.


E는 사무실 비품을 전부 한 곳에 '쏟아서' 한 상자 안에 몰아놨다.

탕비실이든 사무용품이든 내가 정리를 하는 편이다. 상무님과 나는 서로가 참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 왔었다. 하지만 희한하게 사무실 정리 정돈에 있어서는 상무님과 내가 코드가 잘 맞다. 음료는 음료 종류별로, 커피도 커피 종류별로, 컵은 이왕이면 색깔을 맞춰서 그리고 상자는 상자 크기별로 정리한다. 그런데 E가 탕비실이나 사무용품이 들어있는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어느 사이엔가 한 상자 안에 음료와 커피가 섞여 있고, 볼펜과 풀, 가위 등이 한 곳에 섞여서 덩그러니 있다. 결국 모든 직원들이 커피나 필요한 사무용품을 꺼내려면 손을 넣어서 뒤적거려야 했다. 다들 누가 왜 이렇게 해 놓냐고 불평을 하고, E에게 왜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냐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E는 그 이후로도 항상 모든 걸 한 곳에 몰아놨다. 그러다 보니 E가 사무실에 온 이후로 일렬로 가지런히 줄 서 있는 티백을 본 기억도 없다.


E의 자리를 지나갈 때면 나는 E가 출근을 했는지 퇴근을 했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 심지어 E 책상과 나란히 있는 빈 책상도 지저분했다. 나는 내가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는데 자꾸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니 이러다가 내가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E의 책상 옆에는 E의 덩치보다 더 큰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언제 사용할지 모르는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정체 모를 서류함들이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나는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E의 자리는 피해서 우회해서 다녔다.


그랬던 나에게 E는 유독 지난달부터 많은 것을 물어보러 내 자리로 왔다. 내 예상대로 E는 퇴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회사에서 필요한 서류나 절차에 대해서 나에게 물었다. 난생처음 하는 퇴사이고 남의 눈치를 유독 많이 보는 E는 마음고생이 많은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외로움이었을까? 퇴근할 때면 누구보다 쌩하니 먼저 사무실을 나가던 E가 지난달부터는 나를 기다리며 같이 가자고 했다. 나 역시 혼자 퇴근하는 걸 더 선호하는지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며칠 안 남은 E와 몇 마디 더 하려고 퇴근 시간을 같이 보냈다.


같이 간다고 해서 E와 많은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E는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막상 퇴사를 질러놓고 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불안한 여러 가지 것들이 생기나 보다. 나는 E가 퇴사 후에 지금보다 더 좋은 직장에 가서 이 회사에서 했던 것만큼 일을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신선한 많은 자극을 줬던 E가 다음 달이면 떠난다니 아쉬운 마음도 크다. 하지만 앞으로 사무실 비품이 어지럽혀질 일은 없겠다는 안도감이 먼저 드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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