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간방 박씨 Nov 10. 2020

경주는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었다

2박 3일 간 알찼던 경주 여행기

직원 : Where are you from?

Sorita :????????
         hmm... I am from Seoul!!!

직원 : 아! 한국분이셨구나!

Sorita : 하하 네...... 커피 한잔 마실 수 있을까요?


휴가로 경주에 놀러 오자마자 호텔 직원이 영어로 국적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땐 혼혈인이냐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엄청난 시골에서 살면서 혼혈인이냐는 질문을 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은 내가 남들보다 눈에 띄고 이쁘다는 의미로 혼자 받아들였던 기억이 난다. 평소였으면 엄마가 외국인이라고 상대방한테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경주까지 오는 4시간 동안의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멀미로 기력을 다 소진했다.


직원 : 어떤 커피로 드릴까요?

Sorita : 에스프레소 원 샷에 우유 조금만 넣어 주세요


예상치 못한 메뉴였는지 실실 웃던 직원은 갑자기 급정색을 했다. 그리고 주방에 들어가서 '우유! 우유 어딨어?'라고 외치며 급하게 우유를 찾았다. 경주 지방 인심인지 우유를 조금만 넣어 달라는 내 요청과 달리 그 직원은 커피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찬 우유를 넣어서 주셨다. 커피우유 맛이 나긴 했지만 웰컴 드링크 덕분에 니글거리던 속이 많이 가라앉았다.


경주는 초등학교 때 가족여행으로 한 번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으로 한 번 방문한 이후로 성인이 되어 처음 방문했다. 해외에 나가서도 쇼핑보다는 역사 탐방을 좋아하는 내가 정작 한국의 역사 중심지 경주 방문에는 소홀했다. 교토도 지금까지 세 번이나 방문했는데 한국 사람이 경주를 이제야 세 번 방문한 셈이니 이곳에 오는 길에 반성을 참 많이 했다.


체크인 시간보다 경주에 빨리 도착했다. 혹시 early check-in이 가능한지 문의를 했지만 1시간당 만원 씩 더 내야 한다고 해서 짐을 맡겨 두고 숙소 근처에 있던 첨성대로 갔다.


초등학교 때 첨성대에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엄마는 나에게 역사적인 것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어린 나이에 차도 없이 도보로 다니기에는 나에게 벅찬 여행이었다. 그래서 경주라고 하면 힘들었던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에 와보니 많은 카페와 경주 빵집 그리고 상점이 있었고 유적지 표시도 정말 잘 되어 있었다. 목적지가 있었지만 잠깐 헤매는 그 순간도 좋았다. 곳곳이 귀중한 유적지였고 발굴 현장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다가 중간중간 다른 길로 빠져서 세세하게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저 멀리 첨성대가 보였다.


사람이나 건축물이나 꾸미기 나름이구나! 어렸을 땐 초라해 보였던 첨성대가 이번에 와서 보니 새삼 예뻤다. 사진으로 첨성대를 담으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피사의 사탑을 보진 않았지만 지진에도 기울어짐 없이 끄떡없는 첨성대가 대견하다. 그래도 언젠가 피사의 사탑도 보고 싶네


경주는 관광지인데도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았다. 다행히 와이파이가 서울보다 훨씬 잘 터져서 구글 지도로 목적지까지 잘 찾아다녔다.


맡겨둔 짐을 찾아서 늦은 시간에 호텔방으로 들어왔다. 관광지라서 그런지 호텔값이 싸진 않았다. 하지만 현관과 방 사이에 중문이 있어서 소음이 전혀 없었고 매일매일 슬리퍼를 교체해 주는 센스가 마음에 들었다.

침구가 거위털이라서 참 가볍고 따뜻했다. 누우면 몸에 착 감기는 그 느낌이 좋아서 아침에 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었다


여행과 출장으로 지금까지 묵었던 호텔 중에 손꼽힐 정도로 방음이 잘 되고 침구가 좋았던 호텔이었다. 만약 다시 경주에 간다면 이 호텔에 재방문할 의사가 충분히 있다. 다만 전화기가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아서 보자마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조금 뒤에 회사에서 막 전화가 올 것 같은 망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엔 버스를 40분 타고 불국사로 이동했다.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의 불국사다. 다만 그때는 가운데 계단으로 올라 다녔는데 지금은 통제가 됐다
평소 여행이나 출장 가서도 날씨운이 따라주는 편인데 이번 경주에서도 화창한 날씨가 나와 함께 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불국사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애도 날 좋아하게 해 달라'라고 빌었다. 맨입으로 빌어서 그랬는지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네. 이번엔 다른 소원을 빌었다
나이가 들면서 보는 관점도 조금씩 변한다. 요즘은 한국의 기와와 색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불국사에서 버스를 타고 오릉으로 이동했다. 오릉 앞에는 스타벅스와 유명한 맛집들이 많았다.

추사 김정희도 경주에는 인위적인 동산이 많다고 했다. 한강뷰만 좋은 줄 알았는데 자꾸 보다 보니 고분 뷰도 멋지더라. 밤이 되면 고분 아래에서 불빛을 쏘는 게 내 스타일이었다


스타벅스에서 플랫화이트에 샷을 추가해서 마셨다. 시킬 땐 몰랐는데 받아보니 무려 5샷이 들어갔다. 카페인 힘을 빌어 그 날 28,000보 걸었다


가을의 문턱에 경주에 오니 해가 금방 졌다. 오후 5시 30분에 안압지에 입장하려니 이미 야간개장 분위기였다.

안압지가 이렇게 예뻤나? 다른 국가에 훨씬 더 좋은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와 보니 한국이 가장 예쁜 것 같다


마지막 날까지 호텔에서 조식도 일등으로 내려와서 먹었다. 들깨 미역국에 두부조림을 가득 올린 흰쌀밥을 든든히 고 나왔다. 아침에 한식을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밥심으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떨어진 분황사 모전석탑으로 왔다.

이 석탑 바로 옆에는 400년이 된 작은 절이 있는데 이 절 안에 약사여래입상이 있다.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고 그 안에 제작연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약그릇을 들고 계신 부처님은 쉽게 얘기하면 의사 부처님이다. 그래서인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절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7~9층 높이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맛있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가을 지나기 전에 감도 얼른 먹어봐야 할 텐데......


분황사 모전석탑 바로 옆에 황룡사지 9층 목탑 터가 있다. 엄청나게 광활한 터인데 갈 수 있는 곳까지 전부 걸어서 돌아봤다. 미세먼지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좋은 기운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걸을 때마다 옛 기와 조각이 발에 걸렸다.

 

황룡사지 9층 목탑 터다. 광활한 터 너머로는 발굴이 시작되었다. 머지않아 이곳도 천막으로 덮이지 않을까? 그전에 한번 더 와봐야겠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숙소 근처에 있던 김밥집에 갔다.

그 전날 밤에 김밥집을 지나가다 보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색해보니 경주 김밥 맛집이라고 해서 가봤는데 내가 갔을 땐 안에 아무도 없어서 대기 없이 바로 자리에 앉아서 먹을 수 있었다.


경주에서 엄청 유명한 김밥이라고 하는데 1인 2줄씩 팔아서 배 터지게 먹었다. 국물을 줄 법도 한데 맹물만 줘서 먹다가 딸꾹질로 고생 엄청 했네. 두 번 먹을 맛은 아니다


김밥을 먹고 숙소 근처에 있던 고분 사이를 이곳저곳 걸어 다녔다.

남들이 잘 안 가는 고분이라서 정말 한적하게 경주의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걷다 보면 특정 지반이 꿀렁꿀렁했다. '땅 밑이 비어 있다는 건가?' '도굴의 흔적?' 등등 여러 가지 추정을 하면서 땅만 보고 걷다 보니 풀숲 사이에서 500원도 주웠다.


실제로 그 꿀렁꿀렁한 지반 근처에는 땅과 수평으로 잘린 고분이 있었다. 그 고분 안에서 금관이 발견됐다고 한다.


지금까지 본 고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고분도 발견했다. 다른 고분에 비해 크기가 매우 작고 관리가 안된 듯 흙도 듬성듬성해서 고분 안의 벽돌이 밖으로 삐죽삐죽 나와있었다.


통일신라 초기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정말 오래된 모텔 바로 앞에 이 고분이 방치되어 있는 게 아쉬웠다.


작은 도로에 칼로 벤 듯한 모습의 이 초라한 고분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교과서에서 그림으로만 보던 돌무지 덧널무덤이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흙이 씻겨 내려가서 의도치 않게 실제 무덤의 내부를 보고 있었다. 아직 흙이 씻겨 내려가지 않은 무덤 중간중간에 돌이 튀어나와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돌무지 덧널무덤은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껴묻거리가 남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무덤은 이미 일제 시대 때 도굴이 됐다.


2박 3일간의 짧은 경주 여행이었지만 매일매일 알차게 구경하고 가을을 느끼고 왔다. 쌀쌀한 서울에 있다가 경주에 오니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식당을 가나 반찬을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주는 것도 좋았다. 어쩔 수 없이 해외에 못 나가고 국내 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한국에도 볼만한 곳이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올해 가기 전에 한 곳 더 찍어서 고속버스를 타고 멋진 추억을 만들러 다녀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트레이너는 본인의 운동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