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색감과 사각거리는 촉감이 좋은 웨지우드 제스퍼

이사 가시는 분께 떨이로 구입한 빈티지 그릇들

by 문간방 박씨

해외여행을 가면 아래와 같은 이유로 한국인 특유의 성격이 발동한다.


1) 호텔 조식당 문 여는 시간이 7시인데 7시 1분이 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일 때
2) 박물관 입장권을 구입할 때나 교통권을 발급받을 때 한없이 늘어진 긴 줄을 볼 때
3)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서 표를 받으려고 하는데, 직원이 독수리 타법으로 알파벳 하나씩 찾아가면서 입력을 할 때
4) 빈티지 샵에 갔는데 값비싼 물건 포장하는 솜씨가 6살 내 조카보다 못할 때


이런 모습을 보면 여유 있게 여행을 즐기러 온 내 마음속이 어느덧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가끔은 내가 포장하겠다고 나선 적도 있다.


해외의 어느 어두컴컴한 벼룩시장 골목길 안, 한 빈티지 샵에서 물건을 고르다 보면 눈과 손이 굉장히 예민해진다.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칩이나 스크래치를 발견하면 조용히 그 물건을 내려놓는다. 어두워서 눈에 띄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손끝이 내 눈을 대신할 때도 많다. 그러다 보니 이런 빈티지나 앤틱을 사서 모으는 것도 '노안이 오거나 손이 둔해지면 취미 생활이 끝나겠구나'라는 생각도 한다.


영국에 처음 갔을 때 웨지우드 제스퍼를 꼭 사고 싶었다.

현지에 가면 한국보다 훨씬 싸고 좋은 물건을 사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런던에 가보니 상태가 좋고 싼 물건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길거리 벼룩시장에서 도자기를 구입한 다음에 그것을 무사히 호텔까지 들고 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수고였다. (그래도 득템이라고 생각하는 물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 가지고 왔다)


유럽이나 중남미의 그릇 전시관에 가면 꼭 눈에 띄는 도자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웨지우드 제스퍼이다. 멕시코에서 손꼽히는 재벌 사장님 집 유리 찬장 안에도 각양각색의 제스퍼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봤다. 그리고 서울의 백화점에서도 제스퍼를 가끔 볼 수 있다. 하지만 가격이 붙어 있지 않다. 직원에게 얼마냐고 물으면 정말 이 사람이 잘 알고 가격을 부르는 건가 싶을 정도로 비싼 금액을 부른다. 물론 백화점에 들어와 있는 제스퍼들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이지만 빈티지 샵에 있는 제스퍼들도 대부분 진열장에만 모셔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분이 이사를 가는데 짐이 많다고 웨지우드 제스퍼를 나에게 싸게 파셨다. 주말에 나는 아빠 몰래 제스퍼를 부엌에서 세척한 후 햇빛에 잘 말렸다.


20201220_140820.jpg 내가 좋아하는 올리브나무가 부조로 박혀있다.
20201220_140951.jpg 스타벅스 자로 재어 보니 지름이 20cm인 큰 볼이다. 샤인 머스켓을 여기다가 담아서 먹어야 하나?
20201220_141005.jpg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 부조로 부착돼 있다. 파는 분이 처음에는 15만 원을 부르더니 이사 날짜가 다가오자 5만 원에 나에게 팔았다


20201220_141115.jpg 촛대로 사용 흔적이 있다. 안에 촛농이 조금 남아 있지만 포도덩굴이 깨진 것 하나 없이 완벽했다. 2만 5천 원에 구입했다
20201220_141321.jpg 제스퍼 트리오는 처음 봤다. 듀오를 L백화점에서 20만 원 조금 넘게 팔던데 나는 트리오를 6만 5천 원에 구입했다
20201220_141430.jpg 파스텔톤을 좋아해서 그런지 웨지우드 제스퍼는 쉽게 질리지 않는 듯하다


비록 올해 영국에 가진 못했지만 대신 집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영드 '빅토리아'를 시즌 1~3까지 전부 봤다. 어차피 내년까지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는 만큼 앞으로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실내를 좀 더 쾌적하게 유지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는 것 같은 분위기로 조금씩 꾸며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의 생활도 절대 지루하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모아둔 도자기와 그릇 정리를 하다 보면 하루가 짧고 그 당시엔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게 되는 재미도 있다.


현재 영국에 확진자가 200만 명이라고 한다.

내가 가장 이민 가고 싶었던 국가, 세 번째라도 재방문하고 싶었던 그곳, 영국도 역병을 잘 극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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