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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Feb 20. 2021

사는 곳에 대하여

로또 1등 당첨금보다 더 가지고 싶은 그것

주말에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를 둘러본다.

남의 집 구경 가는 게 뭐가 재밌냐고들 하지만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를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내가 발로 뛰면 더 생동감 있고 예상치 못하게 재미난 곳들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창신동 2번 출구로 나오면 580세대가 거주하는 아파트를 둘러봤다. 아파트가 경사진 곳에 지어졌고 지상에 주차를 해야 하기 때문에 노인분들과 어린아이들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지하주차장이 없고 공간이 넉넉하지 않던 지상에 모든 차들이 얼기설기 주차가 되어 있었다. 단지 내 차가 다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던 나는 몇 번이나 차를 피해서 다녀야 했다. 물론 몇 년 사이에 이 아파트 가격도 많이 올랐다.


창신파출소를 끼고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어디가 한 집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나온다. 발끝에 힘을 주고 뒤로 넘어가지 않게 중심을 잡고 걸어야 할 정도의 급경사로 이어지는 골목길이라서 동네 주민분들도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며 숨을 고른 후에 올라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긴급한 상황을 대비해서 지금 내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는 한글과 숫자 조합의 간판이 곳곳에 눈에 띈다. 당황하지 않고 내 위치를 빠르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아이디어인것 같다. 이 동네에서 드라마 '시크릿 가든'도 찍었다고 하니 한 번쯤은 운동 삼아서 올라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골목길과 색다른 분위기의 집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채석장 위에 올라와 있다. 옛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 옛 서울 시청 건물이 전부 창신동 채석장에서 채굴된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확 트인 채석장 전망대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고 근처에 입소문 난 카페 두 곳도 있으니 방문해도 좋을 듯하다. 다만 화장실이 카페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고 열쇠를 가져가야 한다는 점이 나에겐 매우 불편했다.


창신동 골목길을 굽어본 후에 성곽길을 따라서 대학로로 내려왔다. 나처럼 대학로가 있는 혜화동으로 내려와도 좋고 동대문역 방향으로 내려오면 할아버지들이 돗자리를 깔고 오래된 물건들을 파는 것을 구경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지난주에는 버티고개에 다녀왔다. 버티고개 역은 개인적으로 자주 지나다녔던 곳이다. 보통 외근 나갔다가 택시를 타고 버티고개역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버티고개 역은 이대역만큼이나 깊게 위치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과거 방공호로 지어진 모스크바 지하철 역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버티고개 역 주변은 그 지역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조선 시대에 버티고개에는 도적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순찰을 돌던 군인들이 도둑이나 강도를 내쫓을 때 외치던 발음이 현재의 '버티'로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 유행하던 욕 중에 하나가 '이 버티고개 같은 놈'이 있었다고도 한다.


버티고개 역 1번 출구 방향에는 5천 세대가 넘는 아파트가 있다. 이 아파트 역시 채석장 같은 돌 위에 세워져 있어서 '내가 중국에 왔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다. 아파트 유리창은 밖에서 봐도 두께가 얇은 게 육안으로 보인다. 외풍이 심해서 겨울철엔 난방비가 꽤 나오고, 여름철 태풍이 심할 때는 유리창 파손 걱정이 있을 것 같다. 버티고개 역에 있는 이 대단지 아파트 역시 상당한 급경사에 지어져 있다. 아파트 구경을 하러 왔는지 등산하러 온 건지 헷갈릴 정도이니 이왕 온 거 운동하러 왔다는 각오로 둘러보자. 실제로 몇몇 주민분들은 등산 스틱을 가지고 다녔다. 아파트 사이사이로 걸어 올라가며 이런 데서 어떻게 사나 싶을 정도로 끈기 있게 올라가면 매봉산이 나온다. 매봉산 정상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 강변역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매봉산에서 내려오는 코스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좀 더 걷고 싶다면 한남동으로 내려와서 옥수역으로 가지 말고 (옥수역 방향 역시 걷기에는 엄청 가파른 길이다. 이런 길을 걸어서 내려가는 사람은 나 말고 거의 없으니 동네 버스를 타자) 한남 더 힐 방향으로 가면 이태원이나 독일차 본사가 즐비한 핫한 한강진역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한남 더 힐은 내가 지향하는 주거지에 가장 부합하는 곳이다.

내 소원은 로또 1등 당첨이 아니라 한남 더 힐을 매매해서 살아보는 거다. 이곳은 나에게 가깝고도 먼 곳이다. 외근으로 이 곳에 서 한남 더 힐을 바라보며 점심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다른 아파트와 달리 입주민이 아닌 이상은 절대 단지 안에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갈 엄두도 못 낸다. 차라리 맞은편에 담벼락 높은 대사관을 훨씬 마음 편히 다닌다)


동네에 디뮤지엄을 제외하고는 딱히 구경할 거리는 없다. 의외로 여기서 먹을만한 맛집도 찾기 어렵다. 대신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고급진 공인중개소 몇 곳을 볼 수 있다. 한남 더 힐 담장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바깥 부분만 훑어보듯 다녀봤다. 1층이어도 외부에서 안을 보기가 어렵고 테라스가 넓어서 각종 나무와 테이블을 비치해 둔 곳이 많다.

 

학생 때는 집 근처에 대형 마트가 있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일 순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깟 대형 마트 하나 없어도 요즘은 손가락 하나로 신선 식품을 전부 배달시킬 수 있다. 한남 더 힐은 집 이름처럼 애초에 걸어 다니기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언덕길이 많다.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머릿수대로 외제차 한 대씩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한남동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돌아온 우리 집도 나는 매우 만족한다. 평지에 있어서 다리에 알이 생길 일도 없고 단지 내에 차나 오토바이가 다니지 않는다. 게다가 아파트에 이사를 온 이후 한밤중에 이유도 없이 손잡이가 돌아가는 노이로제로부터 벗어났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을 마주칠 일도 없다. 심지어 이웃 간에도 서로 마주치기 쉽지 않은 구조다. 하지만, 단지 내에서도 서로 마음에 맞고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자연스럽게 교류가 있고 (코로나 터지기 전에는 이웃 간에 차 한잔 정도는 왔다 갔다 하며 마셨다) 아파트 카페 내에서 익명으로 정보 교환이나 의견 제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년 전 Y가 이제 막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수험생들이 많이 모인 곳에 있는 싼 고시원을 보러 다녔다.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서 서울에서 다리 뻗고 잘 곳 하나만 있어도 되겠다고 얘기하던 그였다. 그런데 올해 새롭게 들어와 살게 된 그의 집은 고시원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교통편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낫고, 주변 환경도 조용해서 퇴근 후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책하기도 좋은 곳이다. Y가 일을 하면서 직접 경험해서 터득한 지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사는 곳'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인테리어부터 시작해서 작은 화분 하나까지 본인의 공간을 정말 꼼꼼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그의 작은 보금자리는 'WOMAN Dong-A'에 나오는 한 페이지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사회 문화 시간에 '주거'의 개념을 배우면서 '왜 이렇게 쉬운 문제가 매번 시험에 출제되나?'라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순간부터 '어디서 살 것이고,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사회인이 되기 전에 맛보기로 이미 배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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