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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n 02. 2021

한 소년이 갔다

5권 / 10권 소년이 온다

허허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살지 말라고......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야 할 말은 해야죠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은 정지 상태가 됐고, 창밖의 소음도 음소거가 됐다.

몇 초 뒤 나는 중얼거렸다.


ㅈㄴ 멋있다


한 달 넘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 사건과 관련하여,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유명한 심리분석관님이 곧 사건 설명을 명쾌하게 해 주실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의 의견이나 얼굴을 방송에서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분의 말씀을 놓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송에서 인상이 부리부리한 처음 보는 아저씨가 심리분석관이라고 출연했다. 첫인상은 무척이나 강했지만 방송 내내 사건과 관련하여 조곤조곤 본인의 의견을 말씀하시던 그 교수님의 성함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됐다.


내가 이해하기로 교수님께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해야 한다'와 '마지막까지 고인과 함께 있었던 사람'에 대한 행동을 본인이 아는 만큼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분석을 해 주신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이 교수님께서 방송과 학교 강의에서 배제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 만나서 '정말 강의 잘리신 거예요?'라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에이, 설마 헌법 제1조에 나오는 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내용인데, 의견이 누군가에게 거슬리다고 해서 불이익을 준다면 이곳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재작년 필리핀에 출장 갔다가 입국할 때 분명히 나는 인천공항에서 내렸다.

이곳은 북한일 리가 없다!


6월 1일 나는 저자 한강의 장편소설인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작정하고 이 책을 지금 이 시점에 고른 것은 절대 아니다. 몇 달 전부터 친구가 빌려주겠다고 한 책을 2주 전에 받고 이제야 펼쳐 보았다. 그런데 하필 작가 이름이 '한강'이다. 그리고 책 제목처럼 현실에서 한 소년이 (내 기준에는 소년이다) 대략 1달 전에 한강에서 갑자기 시신으로 '나타났다'.


정신 차려 소리따!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은 현실이고 소설은 소설이야. 권력으로 한 개인 (가족)을 망가뜨릴 수는 없는 거야. 소설 같은 일이 우리 사회에 일어나서는 안되고 지금 이 시대에 벌어질 수도 없는 거다. 과거보다 국민의 수준은 훨씬 높아졌고, 언론의 보도 내용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잘못된 방송은 정정보도까지 요청할 수 있는 게 지금의 우리다.


'소년이 온다'는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을 그려낸 작품이다. 부패가 진행되는 수많은 시신들과 한 공간에 머물면서 형, 누나들의 일을 돕는 어린 동호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침착한 아이다. 총 6장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는 동호를 '너'로 칭하며 1장이 시작되고, 2장에서는 동호의 친구였던 정대의 영혼을, 3장에서는 경찰에게 뺨을 7대 맞은 순간순간을 기억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은숙을, 4장에서는 시민군 진수와 감방 동료의 이야기를 그리고 5장에서는 또 다른 시민군이었던 임선주를,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시는 동호의 어머니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2장에서 정대의 영혼이 본인을 향해 총을 쏜 상대방과 쏘라고 명령한 사람에 대한 분노가 거침없이 서술되어 있던 부분이다.


그걸 쏘아 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소년이 온다>


나이가 들수록 '천수를 누리다 죽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깨닫고 있다. 사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그들의 형량이 한 사람이나 가정을 파탄 내놓고도 죗값을 못 치르고 있다는 느낌은 항상 받았다. 정신병이 있거나 우발적인 사고 또는 술에 너무 취해서 (요즘 유행하는 단어 'black out'! 2022년 수능 영어 지문에 나올지도 모른다) 이면 법은 가해자의 손을 더 들어주는 것 같다. 피해자의 분노는 어디에 비빌 언덕도 없는 게 소설 같은 우리의 현실이다. 피해자의 울분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만약 억울하게 죽은 한 개인의 영혼이 저승에 가지 못하고 정말 이승을 떠도는 게 사실이라면 지금도 본인을 해한 자들을 저주하며 울부짖고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 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소년이 온다>


기억이 안 나요. 술을 너무 마셨거든요.

그때 입었던 옷가지 전부 버렸어요.

그러니 이제 그만 제 일상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속이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소년이 온다>


거의 종결된 사건이라고 미리부터 언론에서 떠들고 다니는 것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우리의 인생 선배들이 진실로 지키고 싶었던 정의를 이제는 우리가 넘겨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 그 누구도 한 사건에 대해 그만하라 말을 할 자격은 없다. 그만 해야 할 것은 잘 알아보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언론과 드라마 같은 방송 그리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너튜버들 뿐이다.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 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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