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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Oct 16. 2021

내가 살고 싶은 그 집 (下)

파란 기와집의 정체를 밝혀내다

나에게 소원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대한민국의 과거로 돌아가서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거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년 전, 콜롬비아에 갔을 때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의 7~80년대의 모습을 봤다.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10일 간 머무르면서 한국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 혼자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서울 생활에 익숙한 나로선 다소 원시적인 보고타에서의 생활이 답답한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이나마 한국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만 같은 체험을 한 것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아직도 콜롬비아에는 법규나 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트램이나 버스를 타면 '규정속도라는 것이 이 나라에는 있긴 한 건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그날 순직한 경찰관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납치, 살해와 같은 끔찍한 범죄도 일상적으로 일어나서 골목마다 총을 들고 무장한 경찰들이 경찰견들과 함께 서 있었다.


보고타에서의 마지막 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는데 갑자기 내가 타려고 하는 달라스행 승객을 대상으로 수십 명의 경찰들이 달려들어서 여권과 얼굴을 대조해보는 일이 생겼다. 그곳에서도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만 검문 대상에서 제외가 됐는데, 거의 백 명에 달하는 승객들을 하나하나 조사를 하면서 비행기 탑승 시간은 2시간 이상 지연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달라스에서 한국으로의 연결편 비행기를 놓칠까 봐 애가 탔고, 다음 날 (콜롬비아 시간으로는 이틀, 한국 시간으로는 하루 뒤) 출근을 못하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다소 스릴 있는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온 것만 같았던 콜롬비아의 그때, 그 장소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요즘 들어 특히 그리울 때가 많다. 그러고 보니 과거 서울에도 트램이 다녔고, 지금보다 변화의 속도가 느린 서울이 분명히 존재했을 텐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서울의 옛 모습도 콜롬비아와 비슷했을지 몹시 궁금하다.


그때 당시 종로구 수송동의 파란 기와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과거 수송동 파란 기와집은 지금과 비교했을 때 강남 요지의 100평 대 아파트와 가치가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파란 기와집 바로 너머로 광화문 광장이 있는데 옛날 그 자리에는 더러운 개울물이 흐르고 판자촌이 즐비해 있었다. 지금도 수많은 경찰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미국 대사관 건물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는 나의 수송동 파란 기와집은 몇십 년 전만 해도 다락방에 올라가서 창문을 열면 광화문 거리가 훤히 내려다 보였을 것이다.


공인중개사를 방문하기 전에 나는 인터넷으로 파란 기와집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찾아보았다.

19년째 종로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는 한 회사원도 그 집에 대해 궁금하다며 써 놓은 글이 있었다. 그 글의 댓글에는 '한 할머니가 그 집 대문을 나서는 것을 누가 보았다고 하더라!'라고 써 놔서 마치 도시 전설 속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인터넷에는 과거 종로에 대한 사진 자료가 수백 장 이상으로 넘쳐났지만 정작 내가 찾는 파란 기와집에 대한 사진 정보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파란 기와집의 정보를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곳은 내가 3살 때 설립된 한 개인기업 (소기업) 소유였다. 그때 시 회사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서 '사무실 전화로 한번 전화를 걸어볼까?'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기엔 무서웠다)라는 고민도 잠깐 했다.


그리고 나는 공인중개사를 직접 방문해서 그 집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부터 뻔질나게 돌아다니던 종로 거리였지만 부동산을 눈여겨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미리 파란 기와집 근처에 있는 부동산 몇 군데를 찾아봤다. 예전부터 공인중개사의 말은 50%만 믿으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파란 기와집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정보는 전부 정리한 후 부동산에 방문하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정작 아빠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는 커녕 내가 공인중개사를 방문한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반응하셨다.


아빠 : 넌 인마! 가 봤자 공인중개사가 상대도 안 해줄 거야!

Sorita : 무시하든 말든 난 이번 기회에 그 집에 대해 알아봐야겠어요

아빠 : 넌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사기당하기 딱 좋아. 그 집은 최소 50억이야. 지도를 보니까 위치가 대로변에 있고 노른자위 땅이던데 뭘......


아빠가 처음 가셔서 그 집을 봤을 땐 20억 정도 할 거라고 하셨지만 며칠 사이에 아빠의 감정가는 50억으로 2배 이상 뛰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집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전문가의 말을 통해 그 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겁도 없이 종각역 근처에 있는 부동산 3 곳을 찾아서 1호선을 타고 종각역에서 내렸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다녀서 너무도 익숙한 종각의 거리였지만, 한 번도 관심 있게 본 적이 없었던 부동산을 막상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힘들게 찾은 부동산도 주말이라 그런지 두 곳은 문을 닫았다. 아빠 말씀대로 헛짓거리 하는 건가 싶어서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마스크 안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북촌으로 놀러나 갈까?'라고 생각을 하던 그 순간 저 멀리 '**부동산'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주상복합 1층에 자리 잡은 부동산 안에는 이미 아저씨 한 분이 공인중개사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괜히 내가 올 곳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집 주소를 얘기하자마자 공인중개사가 너한테 택도 없는 곳이라며 꺼지라고 할까 봐 겁도 났다. 한 1~2분 망설이다가 살짝 들어가니 연륜이 있어 보이는 공인중개사 할아버지께서 이 쪽으로 앉으라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공인중개사 : 자! 뭐가 궁금해서 오셨습니까? 궁금한 것 전부 물어보세요
(아빠의 우려와 달리 할아버지께서 굉장히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Sorita : 저...... 알고 싶은 집이 있어서 왔어요. 집 주소 불러드리면 되나요?

공인중개사 : 아 그래요? 주소 불러보세요

Sorita : 수송동 **로 *길 **입니다   


할아버지는 집 주소를 적다 말고 컴퓨터가 있는 자리로 옮겨서 의자에 파묻히듯 깊숙이 앉더니 나를 쓱 보고 말했다.


공인중개사 : 허허, 그 집은 잊을만하면 사람들이 와서 찾는 곳이네요

Sorita : 저 말고도 찾는 사람이 있었나요?

공인중개사 : 아가씨가 지금 열 번째 손님 되시는 분이에요. 아니 근데 그 집은 어떻게 알고 오신 건가요?

Sorita : 예전부터 그 집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곳 집값은 얼마인가요?

공인중개사 : 평당 1억 2천!


우리 집 평당 가격의 무려 3배나 비쌌다......


공인중개사 : 그 집은 사시고 싶어도 못 삽니다. 집주인이 팔 마음이 없어요. 이미 **회사 (대기업)에서도 집주인한테 연락을 했었는데 안 판다고 했고, *** (종교시설)에서는 직접 집주인을 몇 번 찾아갔었어요. 근데도 팔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그 집은 눈독 들인 사람들이 무척 많아요


파란 기와집의 주인은 현재 외국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 집은 방치되어 있는 것 같아도 한국에 관리인을 두면서 가끔씩 관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공인중개사 : 과거에도 종로 이곳은 서민들이 살 수 없는 곳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 살 수 있었던 곳이에요. 이 건물 지을 때 지하 6층에서도 문화재가 쏟아져 나와서 건물 올리는데 애를 엄청 먹었어요

Sorita : 근데 파란 기와집 주인은 왜 집 안 판대요?

공인중개사 : 그건 나도 모르지. 지금 딱 그 집 때문에 ***가 건물을 확장 못하고 있어서 애를 먹고 있단 말이야 허허. 그래서 외국까지 찾아갔는데도 안 판다고 했대요


공인중개사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걸어 나오는데 1N 년 전 처음 서울에 혼자 올라왔을 때 별로 좋지 않았던 그 기분이 떠올랐다. 이 커다란 서울 바닥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고, 과연 이곳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고민이 가득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취업 후 돈 모아서 내가 원하는 곳에 이런 식으로 집을 꾸며서 행복하게 살아봐야지'라고 지금까지 구상해 왔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세상 물정 모르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라도 있었던 그때가 더 나은 건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부동산에서 나와서 걷다 보니 파란 기와집에 도착했다.

아빠가 예상했던 50억을 훌쩍 뛰어넘어 100억이 넘는 이 집은 설령 100억이 있다 해도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왔다.


내가 탐내는 것은 남들도 이미 탐을 내고 있었다. 집에 대해 설명을 듣고 미련도 없이 단념하고 나니 이 집이 또 다르게 보이더라
다락방 유리창에 이가 하나 나갔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커보이고 높아 보이던 파란 기와집이었다. 근데 집 밖에 쓰레기는 왜 안치우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종각에서 가장 유명한 절에 들렀다.

마침 국화 축제를 하고 있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절에 들어가 소원을 빌고 있었다. 나는 무교이지만 교회에 가면 예수님께 기도하고, 성당에 가면 성모 마리아 님께 빌고 그리고 부처님께 가면 또 현재 가지고 있는 고민을 해결해 달라고 엎드려서 절하고 온다.


오늘은 부처님께 이렇게 빌었다. 나도 파란 기와집 아저씨처럼 팔라고 해도 팔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ㅈㄴ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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