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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Oct 24. 2021

그곳

나도 사회초년생이었던 적이 있었다

유일하게 그곳에는 나와 같은 회사원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말에도 회사에서 걸려오는 연락들을 뒤로한 채 일요일마다 그곳에 있는 산에 다녔다.

처음에는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1시간 15분이 걸렸다.

두 달 동안 일요일마다 꾸준히 다니다 보니 시간을 50분으로 줄일 수 있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서 시간을 40분까지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궂은 날씨도 나의 산행을 막을 수 없었고, 멧돼지가 출몰하니 조심하라는 팻말도 나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그땐 산적이나 멧돼지를 만나도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화가 많고 머릿속에 스트레스를 가득 담으며 살았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산에서 촘촘하게 경비를 서 있던 친구들은 내가 뛰다시피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무전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몇 걸음 떨어져 있지도 않던 다른 직원에게 나도 다 들리게 알렸다.


그땐 그곳의 감시가 철저했고, 등산객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다.

북한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데 북쪽이 있는 곳으로는 사진 촬영도 엄격히 금지했고, 목에 걸린 명찰이 뒤집어져서 번호가 보이지 않으면 제대로 착용하라고 바로 주의를 받았다.


6개월이 지나자 나는 정말 그 산을 40분 만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 있었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질수록, 힘이 더 들수록 사람들과 회사 스트레스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출근해서 사무실 의자에 앉으려면 나의 두 다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개다리춤을 췄다. 그땐 운동화도 6개월에 1켤레씩 교체를 했었다.


평일에 외근을 나와서도 굳이 그 산 아래에 있는 한 칼국수집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먹었다.

일을 마치고 30분 정도 더 걸어야 도착하는 그 칼국수집은 나름 손칼국수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직접 만들어주시던 칼국수를 먹고 자란 나는 그 칼국수를 진정한 손칼국수로 인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주인 할머니는 기계로 반죽하고 면만 손으로 쓱쓱 자른 후 칼국수를 완성시켜서 나에게 한 그릇 내주셨기 때문이다. 심심한 국물에 김치도 너무 익어서 특별할 것 없는 맛이었지만 나는 굳이 그곳까지 걸어와서 이른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갔다.


물론 나도 처음 외근을 나왔을 때에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곳을 찾아가서 밥을 먹기도 했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회사원들 틈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의 일 얘기를 들으며 밥을 먹으니 그곳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식당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체험 삶의 현장 같았다.


결국 그 분위기를 못 이기고 나는 자리를 옮겨서 최대한 회사가 없는 곳에 위치한 식당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적이 드문 한 손칼국수집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곳은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부모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신 주인 부부는 무심한 듯했지만 친절하셨고, 테이블 위에 놓인 보리차 물은 어렸을 적에 엄마가 진하게 끓여주신 그 맛과 굉장히 비슷했다. 좁은 테이블 옆에서 칼국수를 먹던 사람들 역시 말 한마디 없이 식사를 빨리 하고 서둘러서 빠져나갔다. 무엇보다도 그 식당이 마음에 들었던 점은, 손님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직업 특성상 내가 화장실에 가더라도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소지품이 분실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은 안심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울의 한 손칼국수집의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나의 어리숙함과 고민으로 가득 찼던 깊은 한숨이 아직도 가득 깃들여 있을 것만 같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더 이상 그 칼국수집에 가지 않게 됐다.

웬만한 회사일이나 사람들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의 짬밥을 가지게 된 후로 나는 이제 수많은 회사원들 틈에서 맛있는 점심을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지금 그 산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명소가 됨으로써 무전을 들고 촘촘하게 경비를 서던 친구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산을 오르며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됐고, 새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 부담감에서도 조금이나마 해방이 됐다.


세상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가득 가지고 다니던 그곳은 사실 서울에서 가장 안전하고 거리가 깔끔한 곳이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는 Y가 있다. 과거엔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곳에서 근무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 때 내 나와바리였던 그곳에서 Y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는 잘 시간이 아닌데 잠을 자는 것 같기도 하고, 자야 할 시간인데 일을 하기도 한다. 나의 회사생활 절반 이상을 풀리지 않는 고민과 스트레스를 가지며 걸었던 그 장소에서 Y는 1년째 일을 하고 있다. 덕분에 Y에게서 칼국수집의 소식도 가끔 전해 듣는다. 요즘은 그 손칼국수집이 문을 열지 않아서 Y는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말에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기분도 든다. 내가 Y의 나이였을 때 그곳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며 먹었는지 그가 앞으로도 몰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계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가을 중에서도 특히 늦가을과 닮았다. 단풍잎에 비유하자면 다른 잎보다 햇빛을 더 많이 받아서 유독 빨갛게 물이 들었다. 남들보다 좀 더 성숙한 점이 조직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본인 특유의 여유로움과 무던한 모습으로 잘 버티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생일 역시 늦가을의 어느 날이다.

작년에 우리는 망원동에서 이른 생일 파티를 했고, 올해는 내가 평일에 하루 휴가를 내서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한다. Y는 현재 또 다른 목표를 가지고 바쁘게 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나는 사원일 때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미래를 계획하기는커녕 이 생활을 언제 끝낼 수 있을지 고민했고, 하루살이처럼 매일매일 버티고 무사히 퇴근하는 것이 그날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런 내가 감히 그에게 '열심히 해서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한번 가보라'라고 카카오톡의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는 흔쾌히 '그러겠다'라고 답을 했다.


나보다 하루를 더 바쁘게 사는 그에게 아마도 이번이 우리가 만나는 올해의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우리는 늦가을의 어느 날, 어느 시간에 생일 파티를 핑계로 늦은 점심 식사 약속을 잡았다.


종로 골목골목에는 저렴하고 맛있는 칼국수집이 곳곳에 숨어 있다. 굳이 그곳까지 찾아가서 칼국수를 먹을 필요는 절대 없다. 현재는 음식을 먹을 땐 즐겁게 먹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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