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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Nov 16. 2021

세입자 이야기 (下)

9권 / 10권 밝은 밤

사람들이 내게 이상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다음과 같이 비슷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겨울에 빨래를 하고 있으면 손이 시리지는 않은지 알아보고, 장을 봐오면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사람. <밝은 밤, 최은영>


어찌 보면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람일 것 같지만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정말 동화 속에 있는 왕자님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극히 드물었다.



세입자가 소개해준 그 남자는 나보다 9살이 더 많았다.

세입자와 내가 5살 차이가 나서 선을 보는 남자도 기껏해야 4~5살 차이로 짐작을 했던 나는 갑자기 '우리 부서 *** 부장님이 나랑 몇 살 차이였더라?'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부모님이 8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거기서 1년을 더한 9살 차이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큰 거부감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예전부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하고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다. 나보다 세상 경험이 많기 때문에 내가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을 것 같고, 나에게 조언도 많이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몇 차례 겪어보니 나이가 많다고 해서 더 좋은 사람이거나 지혜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인간 나름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상대가 나에게 찾아와도 그 관계는 장기적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혼은 사업과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Sorita라는 한 회사가 다른 회사와 만나서 1+1 =2의 답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1 이하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 아주 작은 행복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재무적으로나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한 회사를 '이 정도면 다들 감수하고 살겠지'라는 잘못된 판단으로 합병을 했다가는 두 회사 모두 끝이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할 거라며 나는 남들이 보지 않는 사소한 것에도 항상 매사에 신중했다.


내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면 그때 만나자고 했던 S는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스위스 레스토랑에서 만났으니까 그냥 S라고 부르겠다) 정작 주말에는 시간이 안된다고 했다. 평일 저녁에 약속을 잡자는 말에 나는 금요일 저녁 시간이 어떻냐고 카톡을 보냈다. 하지만, S는 금요일은 안되고 목요일로 잡자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럴 거면 미리 본인 의견을 정확히 이야기하지 뭐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중에 하나가 '본인의 의견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결국 나는 S의 시간에 맞춰서 다음 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 스위스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


부모님께서는 세입자가 보내온 그의 이력에 대해서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엄마는 벌써부터 그가 청담동에 산다는 말에 우리 형편이 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엄마한테 '모든 것은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 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다행히 다음 주 목요일이 재택근무로 잡혔고, 근무를 마치고 여유 있게 스위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보통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나는 7시 10분에 미리 도착해서 내가 예약해둔 자리에 앉았다. S가 차를 가지고 올 것에 대비해서 몇 시간 무료 주차가 가능한지도 확인을 했다. 레스토랑 안에서는 회식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데이트를 하는 커플도 있었다. S를 기다리는 동안 레스토랑 곳곳을 구경하고 메뉴판을 보며 뭘 먹을 것인지도 이미 결정을 했다. 초봄이라 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밖이 훤했다. 밖으로 보이는 담 바로 너머로 Y가 근무를 하고 있다. 나는 메뉴판 위에 턱을 괴고 그가 오늘 근무를 하는지, 근무를 한다면 오늘은 보통 회사원들처럼 퇴근을 하는지 궁금했다. 이번에 스위스 음식을 먹어보고 맛이 있으면 꼭 Y를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 오늘은 맛만 보러 온 거야!'라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7시 25분쯤 키가 185cm는 되어 보이는 엄청 건장한 남자가 내 이름으로 예약된 자리를 찾으며 헐레벌떡 들어왔다. 서로 인사를 하고 얼굴을 보니 세입자가 보내온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 사진인 것 같았다. '나도 회사에서 우리 막내들한테 이 정도 연배로 보일까? 앞으로 복부랑 힙 그리고 목주름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겠다'라는 다짐을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주도적으로 말을 잘할 것 같았던 S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오늘도 나는 거래처 회식을 하는 것처럼 메뉴판을 S에게 보여주며 이 식당의 대표 메뉴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깨 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우리의 첫 대화부터 그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S : 그동안 바쁘셨나 봐요?

Sorita : 네?

S :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서요

Sorita : 아...... 주말에 시간 안되고 목요일만 가능하다고 하셔서 그다음 주 목요일로 약속 잡은 건데요...


분명히 한민족끼리 모국어로 증거가 남는 카톡으로 대화를 했지만 이렇게 서로 소통이 안될 때가 있다. 주말과 평일에 골프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해서 결국에는 내가 본인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맞췄으면 배려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할 망정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메뉴판을 보고도 한참을 헤매던 S를 위해 나는 사람들의 후기가 좋았던 메뉴 몇 가지를 골라 주었고, 그는 나와 같은 음식을 시켰다. 평소 음료를 따로 시키지는 않지만 이 식당 뱅쇼가 맛있다는 후기를 보고 나는 뱅쇼 그리고 그는 사이다를 시켰다.


Sorita : 차 가지고 오셨나 봐요

S : 네, 아... 정말 강남에서 강북으로 운전하기 힘들었어요. 직장이 이 근처신가 봐요

Sorita : 아뇨, 직장은 **에 있어요.

S : 아, 난 또 직장 근처로 식당 잡은 줄 알았죠

Sorita : 아뇨, 집도 직장도 여기 근처는 아니에요

 

내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날은 호르몬 탓인지 몰라도 유난히 속에서 화가 많이 났다. 장소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지, 운전이 미숙한 본인이 강북으로 차를 끌고 오는 게 힘들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는 건지, 그럴 거면 본인이 식당을 정해서 알려주지 왜 나한테 장소를 정하라고 했을까?라는 의문만 가득 남았다.


하지만 화를 내기에는 송아지 고기와 감자 무스가 정말 맛이 있었다.

그런데 음료로 나온 뱅쇼가 알코올이 상당히 세서 몇 모금 마시다 보니 나른해지며 눈이 자꾸 감겼다. 지금까지 먹어본 뱅쇼 중에 가장 알코올이 센 것 같았다. 급하게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취하나 싶을 정도라서 나는 뱅쇼를 반절 정도 남기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맹물을 중간중간 많이 마셨다. 게다가 이 상태로 더 대화를 했다가는 심신 미약으로 S를 한 대 때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S : 직급은 뭐예요?

Sorita : 과장이에요

S : 어? 벌써 과장이에요?

Sorita : 내년에 차장이에요

S : 잉?

Sorita : 왜요?

S : 너무 빠른데?

Sorita : 뭐가요? 저 특진한 적 없고 입사해서 그대로 승진한 거예요

S : 아닌데... 너무 빠른데......


이 사람은 내가 싫어하는 대표적은 유형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위에 이야기한 대로 본인의 의견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말끝을 흐리면서 반말을 하는 거다. 만화 속에 나오는 어느 캐릭터처럼 S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내년에 차장이 되는 것이 너무 빠르다는 것에 계속 의의해하고 있었다.


Sorita : 본인은 혹시 지금 차장이에요?

S : 네...

Sorita : 차장 1년 차?

S :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면 차장 1년 차든 과장이든 크게 개의치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 한다고 지금 부장이 되어도 시원찮을 판에 고작 차장 1년 차인가 싶었다. '대학을 6수 하셨나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오는데 도움 준 거 1도 없으면서 승진이 빠르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마지막으로 뱅쇼를 한 모금 마시고 송아지 고기에 소스를 듬뿍 묻혀서 입을 닫았다.


Sorita : 여기 무료주차 2시간이에요

S : 아... 주차장 있는 줄 모르고 다른 곳에 주차했어요


S는 10분 단위로 주차비가 올라가는 주차장에 주차를 했던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본인 차에 타라고 했고, 나 역시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흔쾌히 차를 얻어 탔다. 그리고 나는 밤에 서울 시내를 차로 돌아보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부처님 오신 날로부터 며칠 전이라 서울 시내에는 빨강, 초록, 노랑 그리고 핑크의 연등이 거리를 훤히 밝히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봐도 연등이 다 보일 것 같아서 이 정도 예쁨이라면 부처님이 정말 인간 세계에 잠깐 내려와서 구경하고 가실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S의 차는 내가 평소 마음속에 찜해뒀던 차였고, 내 예상대로 승차감은 굉장히 좋았다. 다만 서울 시내에서 규정된 속도로 달리지 못하고 속도를 높였다가 줄이기를 반복하니 그 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S는 우리 집 아파트 정문 앞에서 차를 돌려서 나를 내려줬다.

이것으로 차장 1년 차인 그 사람과 나와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결혼은 글렀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허전했다.


무리를 이루는 듯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도 철저히 혼자이며,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있던 물질들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껴왔던 슬픔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밝은 밤, 최은영>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나에게 S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엄마가 알고 계신 대로 S는 청담동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보다 4살 더 많은 미혼인 여동생과 함께 동생 소유의 투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퇴근하면 동생이 집안일까지 다 해놔서 너무 편하다고 했다. 앞으로 따로 살게 되면 오히려 걱정이라고 말하던 그는 그래도 화장실 청소는 본인이 전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작 본인 소유로 가지고 있었던 것은 대출을 받아서 구입한 재개발 예정 구역의 언제 철거될지 모를 한 건물이었다. 그 지역은 모르긴 몰라도 그 사람보다는 내가 더 잘 아는 곳이었다. 당장 재개발이 되어 그 자리에 본인 뜻대로 아파트가 들어선다면 그야말로 천운이고 해피엔딩이겠지만, 현재로서는 빨라야 20년 후에나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공인중개사가 '특별히 너한테 먼저 연락한 거니까 이 가격에 꼭 사!'라는 말에 바로 질렀다는 그 사람은 그냥 나이만 먹은 호구 같았다. 너무 앞서간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이런 남자와 결혼을 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함께 억대의 대출금을 갚아 나가야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출금을 갚아야 할 사람이 2시간 무료주차장을 코앞에 두고 사설주차장에 주차를 해서 쓸데없이 지출을 한 것부터가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부모님은 그날 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 후 아빠는 몇 주간 나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드러냈고, 엄마 역시 언제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안타깝고 실망스러웠던 것은 부모님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 이렇게 가끔 한 번씩 누군가를 만나서 아무 소득도 없이 집에 오고 나면 마음이 너무 허전하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밝은 밤, 최은영>


그 후로 S를 소개해준 남자 세입자의 소식을 또 한 번 들었다.

그는 8천만 원의 연봉을 뛰어넘어 1억의 연봉을 주는 회사로 이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집을 구하지 못해 부모님의 집에서 여섯 식구가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한다) 살고 있다고 한다.


세입자와 S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얼굴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앞으로 주말마다 만나게 될 캠핑 동호회 친구가 될 거라고 했다. 남자들이 어떻게 노는지는 별로 관심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연봉 1억을 받고 있다는 세입자나 차장 1년 차인 S 모두 둘 다 별로이고 내가 놓쳐서 아깝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다는 거다.


작년에 나도 S가 봐 두었던 재개발 구역을 둘러봤던 적이 있었다.

그때 시장 안에서 묵주를 책상 앞에 놓고 파리만 날리던 할아버지한테 사주를 봤었다. 그 할아버지는 이미 내 주변에 배우자가 있으니 올해 안에 결혼을 하게 된다고 했다. 첫째는 딸을 낳을 거라며 이미 내 운명은 정해진 것처럼 말씀을 하시던 그 할아버지께 벌써 올해가 2달도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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