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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Nov 26. 2021

고시생이 회사원이 되면

체력은 국력

나의 옆 사무실에 근무하는 K 씨는 우리 회사에 입사한 지 이제 2년이 되어 간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S대 법대를 졸업하고 신림동에서 행정고시를 8년 동안 공부했다. 공부를 하다가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갔다. 그런데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명을 해줬지만 정확히 이해를 못 했다) 갑작스럽게 전역을 앞두고 K대 도서관에서 대체근무를 했다고 한다. 그 후 신림동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여 스터디도 참석을 안 하고 모르는 것은 본인을 담당했던 교수님께 직접 물어보며 법 공부를 했다는 K 씨는 8년 간 1차 합격도 쉽지 않았다.


8년을 매일 7시간씩 공부했다는 K 씨의 공부 시간이 합격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고 내 주위의 유일한 공무원인 Y는 이야기했다. 하지만 20대의 전부를 신림동의 한 고시원에서 보낸 K 씨는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고 자주 이야기를 한다.


K 씨 :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Sorita : 모르죠, 난 그렇게 공부해 본 적이 없거든요

K 씨 : 힘들어요... 힘듭니다. 몸 다 망가집니다...


K 씨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오빠이지만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직급은 사원이다.

처음 내 사무실에 들어와서 본인 소개를 할 때 나는 경력직 차장님이 입사한 줄 오해했다. 현재 K 씨의 머리는 처음 만났던 2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빠졌다. 가끔씩 그가 이발을 한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르마가 바뀐 걸 볼 수 있다. 그게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인 듯하다. 


나는 K 씨가 부담스럽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아는 일반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 독특한 걸 떠나서 자기만의 세계가 있고 가끔씩 그가 본인 주장을 강하게 이야기하면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에게 다가올 때 겁이 난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아무리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나는 한 손으로 K 씨를 제압할 자신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출근 시간에 항상 그를 피해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K 씨와 나는 같은 전철에서 내렸다.

일부러 회사에서 먼 출입구로 나와서 길 건너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출근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전속력으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K 씨 : 오래간만입니다. 과장님

Sorita : (전혀 몰랐던 것처럼) 요즘 잘 지냈어요? 회사는 이제 다닐만하죠?

K 씨 : 하... 모르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Sorita : 뭐가 힘들어요?

K 씨 : 지금이 한계인 거 같아요. 체력적으로 너무 힘이 듭니다

Sorita : 그쪽 부서는 야근도 없잖아요. 점심도 남들보다 빨리 먹고 1시 넘어서 늦게 사무실에 들어오고요. 여유로운 부서라고 소문 다 났어요

K 씨 : 이제는 다닐 힘이 없어요

Sorita : 그럼 운동을 좀 해요!

K 씨 : 운동은 매일 합니다. 헬스도 하고요, 등산도 합니다


나는 K 씨의 몸을 힐끗 쳐다봤다.

운동을 매일 하고 있다는 사람치고는 팔다리가 가늘고 배만 나온 거미형 체형에 근육은 하나도 없었다. K 씨는 본인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을 잘못 골라도 한참을 잘못 골랐다. 나는 개인적으로 '힘들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굉장히 싫어한다. 나도 회사에서 항상 힘들지만 어찌 되었건 버티고 있고, 내 기준으로 정말 힘들게 일하는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K 씨 : 3년 간 딱 이틀 쉬어봤어요

Sorita : 왜 3년이죠?

K 씨 : 고시 공부 끝나고 1년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이 회사에서 2년을 일했잖아요. 이직하면서 고작 이틀 쉬었습니다

Sorita : 난 회사 입사해서 1N년동안 한 번도 안 쉬고 쭉 일했어요. 난 이틀이라도 쉬어봤으면 좋겠네요

K 씨 : 20대 때 체력을 다 쓴 거 같아요

Sorita : 아! 고시 공부하면서요?

K 씨 : 네......


지금까지 소개팅이나 선을 보면서 남자가 회사일이 힘들다고 하는 것만큼 매력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주 가끔은 본인은 결혼해서 가정주부로 생활할 테니 나보고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남자도 있었다. '회사일도 못하게 생겼는데 집안일이라고 잘할까? 집에서 늦잠이나 자고 점심때나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하고 돌아다니게 생긴 사람이......'라고 한마디 하려다 참은 적도 몇 번 있었다.


'상대방을 엄마 같은 마음으로 따뜻하게 감싸줘야 나도 결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서는 씩씩하게 본인 일 하면서 더 열심히 인생을 개척해 나가려는 남자가 훨씬 더 끌린다. 다만 아직까지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게 아쉽고 원통할 따름이다.


그날도 K 씨는 현재 본인이 체력적으로 얼마나 바닥상태인지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며 하소연을 했다. 하필 엘리베이터 안에는 K 씨랑 나 둘 뿐이었고, 나는 또 한 번 알 수 없는 공포심을 살짝 느꼈다. 


Sorita : 다른 곳에 이직 결정되고 나서 회사 그만둬야 해요

K 씨 : 그만두지도 못합니다. 제 대학 동기들 다들 지금 은행이랑 기업에서 구조조정 대상이에요


현재 회사가 뒤집어지기 일보직전인데 K 씨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본인의 체력 걱정이 우선이었다. 회사 상황은 아냐고 물어봤자 그의 우선순위는 본인 건강일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각자 사무실로 들어와서 오전 회의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문자가 왔다.


K 씨 : 과장님, 아까 전에 고마웠어요^^

Sorita : ㅋㅋㅋㅋㅋㅋ뭐가요 ㅋㅋㅋㅋㅋ

 K 씨 : 아뇨. 그냥 감사드립니다 ^^


회사 연락망에 있는 내 핸드폰 번호를 보고 문자를 보낸 건지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K 씨 : 이 번호는 제 핸드폰 번호입니다

Sorita : 알아요


그래도 항상 결말은 따뜻해야 하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따스한 메시지를 K 씨한테 보냈다.


Sorita : 오늘 하루도 힘내요 ^^

K 씨 : 네 과장님도 오늘 하루 힘내시고요 ^^


K 씨가 행정고시를 멈출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갑작스럽게 돈을 벌어야 하는 개인사가 있었다. 가슴 아픈 사연이지만, 만약 그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까지 신림동의 어느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까?


나는 가끔 이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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