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간방 박씨 Nov 03. 2021

북촌산책

수고했어. 올해도.

Y는 사주를 볼 줄 안다고 했다.


생년월일 그리고 태어난 시간을 나에게 물었고 핸드폰으로 입력한 다음에 결과값을 보여줬다. Y는 내 사주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는 많은 것이 들어있다며 놀라워했다.


지금까지 사주를 봐서 나쁜 얘기를 들었던 적은 없었다.

사주를 봐줬던 사람들이 나에게 좋은 얘기만 골라서 얘기를 해 준 것일 수도 있다. 사주는 뻔한 것 같고, 들었던 얘기를 또 듣는 것 같아서 세 명의 무당한테까지 간 적이 있다. 한 번에 세 명의 무당을 방문했던 것은 아니었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직장인들만이 아는 그 슬럼프의 고비 때마다 각각의 다른 무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세 명의 무당 중에 단 한 명도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회사가 나랑 잘 맞고, 위에서 이끌어주는 사람도 있으니 잘 지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맡고 있는 부서도 나랑 너무 잘 맞다고 했다.


의외였다.

회사를 다니는 이 시간이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인간 세계까지 내려와서 그렇다고 이야기를 한다고 하니 나는 그냥 믿었다. 그렇게 세 번의 고비도 그렇게 넘겼다.


사주 보는 방법을 이제 막 배웠다는 Y는 내 사주에 '금전운', '배우자운', '역마살' 그 외에 정말 다양한 것들이 나에게 있다고 했다. 사주를 풀어주다가 말이 막히자 너튜브에서 내 사주와 비슷한 사람 사주의 영상을 나에게 보여줬다. 난 이런 거 더 필요 없고 '배우자운'이 있다는데 내 배우자는 언제 만나냐고 물었다. 그런데 사주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날짜를 정해주지는 않은가 보다.


Y랑 나는 어느 평일의 오후 2시 30분만났다.

원래 약속 시간은 오후 2시였지만 나는 Y에게 잠을 시간을 30분 줬다. 이렇게 그는 남이 자지 않는 시간에 잠을 잔다. 잠이 올까 싶은데 그래도 본인은 잔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직업을 Y는 운이 좋아서 5개월 만에 시험을 끝낼 있었다고 항상 얘기한다. 그래서 나는 Y가 1점 차이나 추가합격으로 겨우 입학하게 된 줄로만 오해하고 있었다.


올해 중순부터 Y는 비건이 됐다.

Y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식당은 비건 중에서도 상당히 강도가 센 비건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은 나도 아는 곳이었다. 이곳을 다시 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 식당 이름이 카카오톡 메시지에 뜨자마자 나는 빵 터졌고 그가 스님이 되기라도 한 건지 살짝 걱정됐다.



4가지의 간판 중에서 가장 땡기는 곳은 편백찜인데... 1년 전 망원동에서 편백찜으로 편백 바닥이 보일 정도로 싹싹 긁어서 먹었던게 눈에 선한데... 이제 Y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내가 처음 비건 음식을 접한 것은 학생일 때 서울대 농생대에서 열린 비건 축제였다.

더운 날씨에 스님처럼 퍽퍽한 음식을 먹으라니 목구멍에서 자꾸 브레이크를 걸었고, 주최자가 인도인이라서 숟가락과 포크 수량도 모자랐다. 친했던 인도 남자는 나에게 손으로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이게 따로 방법이 있을까 싶지만) 맛있게 많이 먹으라고 음식을 잔뜩 가져다주었다. 내 생애 첫 비건에다가 인도 문화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인데 화장실에 가서 손이라도 씻고 먹고 싶었다. 하지만 화장실에 비누도 없어서 상추 잎을 비닐장갑 삼아 힘들게 집어서 꾸역꾸역 음식을 먹었던 아찔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회사에서 무슬림들을 접대하며 같이 식사할 때 비건 음식을 접했고, 법인카드로 식대를 결제하면서 비건 음식이 일반 음식보다 몇 배는 더 비싸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나는 이미 인사동에서 비건 레스토랑을 몇 번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Y가 소개한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식당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가 사이비 느낌이 나서 조금 무서웠다. 딱 봐도 스님 느낌이 나는 전등이다


그런데 이 식당도 브레이크 타임이 있는 듯했다.


[Y] [오후 2:26] 지금 명동 지나고 있어요!

[Sorita] [오후 2:28] 난 방금 들어왔어. 손님은 나 혼자ㅋㅋㅋ

[Sorita] [오후 2:28] 조용히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Y] [오후 2:29] 좋군요!

[Y] [오후 2:29] 메뉴 쓰윽 보고 계셔요 ㅎㅎ

[Y] [오후 2:29] 곧 도착임다!

[Sorita] [오후 2:31] 천천히 오라고 하려 했는데 사장님이 3시 30분에 문 닫는대ㅋㅋㅋㅋ

[Y] [오후 2:31] 헛 얼른 갈게요

[Y] [오후 2:31] 이모티콘

[Y] [오후 2:33] 아니면 미리 시켜둘까요?

[Y] [오후 2:33] 저는 순두부강된장비빔밥 먹을게요!


필라테스 선생님이 식단을 클린하게 바꾸라고 매일 잔소리하시는데 정말 나도 비건이 되어야 하나 이 설명을 보고 잠깐 고민했다


사장님께 순두부강된장비빔밥 하나랑 순두부찌개를 미리 주문했다.

몇 분 뒤 문이 열리며 영화에서 보던 맨 인 블랙 한 명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구두부터 코트까지 올블랙으로 차려입고 온 Y는 나를 보자마자 머리 짧게 자른 게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낫다고 큰소리로 칭찬부터 해줬다.


음식은 곧이어 서빙이 됐다.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누가 순두부를 시켰고 강된장을 주문했는지 전혀 모를 텐데 우리한테 전혀 묻지도 않고 이미 다 안다는 듯이 음식을 차려주셔서 깜짝 놀랐다.


Sorita : 아줌마가 우리가 각각 뭐 시켰는지 어떻게 알고 차려주시지?
Y : 어?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어떻게 아셨지?
Sorita : 아줌마도 경찰일 수 있어. 잠복경찰 아냐?


Y는 잠을 자고 와서 그런지 지난번보다 컨디션이 훨씬 좋아 보였다.

내가 몇 마디 하는 것에도 잘 웃고 훨씬 밝아 보였다.


간이 전혀 안된 순두부와 강된장비빔밥이다. 반찬으로 나온 어묵은 곤약으로 만들어져서 무지하게 쫄깃쫄깃했다.


어묵이 먹고 싶으면 그냥 지하상가에서 미도어묵 하나 사 먹으면 되지 굳이 곤약으로 힘들게 어묵 맛을 낼 필요가 있나 싶었다. Y나 나나 반찬으로 김치만 집어먹고 어묵과 그 옆에 알 수 없는 반찬은 젓가락 한 두 번 가고 손대지 않았다.


Y는 인사동도 안 와봤고 종각에서 가장 큰 절도 안 가봤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절에 대해 조금 설명을 해 주고 직접 가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내 꿈의 파란 기와집도 보여주기로 했다.


종각에 내가 눈여겨보는 또 다른 2층짜리 건물이다. 이곳 2층 역시 오래전부터 빈집인듯 하다. 종각에서 가장 큰 절은 항상 행사가 많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


곧 수능이라 정말 많은 엄마들이 자리에 앉아서 부처님께 빌고 있었다.

전국 모든 엄마들이 자식들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빌면 꼴등은 누가 할까 싶다.


절 안에는 국화축제가 한창이었다.

꽃구경도 못한 것 같은 Y를 데리고 절에 있는 핑크뮬리도 보여줬다. 그리고 나만 아는 샛길로 빠져나와서 파란 기와집 대문 앞에 서서 둘 다 까치발을 들고 안을 구경했다.


Sorita : 여기가 내가 처음 서울 왔을 때부터 사고 싶었던 집이었어. 근데 100억이 넘는데 주인이 안 팔겠대
Y : 와! 정말 일본식 집이네요. 근데 왜 안 팔까요?
Sorita : 옛날 우리 조상들이 쓴 책에도 '한양에 있는 집은 팔지 말고 두라'라는 문구가 있거든. 주인도 그걸 알겠지. 앞으로 더 오르면 올랐지 떨어질 일은 없다는 것을......
Y : 그래도 앞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Sorita님한테 팔 수도 있잖아요?
Sorita : 난 돈도 없고, 이 집을 탐내는 또 다른 누군가가 대기업보다 더 튼튼한 저 절이거든.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저 절은 더 세력을 확장할 거야
Y : 그래도 사주에 금전운이 있고 좋은 운이 많으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공인중개사나 나의 부모님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 박아서 이야기했던 것을 누군가가 '가능하다'라고 이야기를 해주니 살짝 설렜다. 나에게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준 Y에게 만약 내가 이 집을 소유하게 된다면 근무하다가 언제든 이 집에 와서 쉴 수 있게 열쇠를 주겠다고 했다. 워낙 큰 집이라서 서로 문 닫고 있으면 왔는지도 모를 테고, 예전부터 집에 빈 방을 방치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거의 20년 가까이 빈집으로만 있던 대문 앞에 두 사람이 소꿉장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딘가에 주인이 설치해둔 CCTV에 다 찍혔을지 모르겠다. 공인중개사 방문 후 마음속에서 완전히 미련을 버린 이 집이 아주 조금이나마 다시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Y는 밥도 사주고 별다방에서 차도 사줬다. 차도 내가 원하는 '아주 뜨겁게'로 알아서 주문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


우리는 북촌을 잠깐 걸었는데 혹시 내가 가방에 무거운 책을 들고 걷는 건 아닌지 미리 확인하는 센스도 있었다. 걸을 때 나를 안쪽으로 배려해주는 세심한 부분에 오늘 마치 특급 경호를 받는 기분도 들었다.


안국역으로 내려와서 나는 다른 노선으로 타기 위해 좀 더 걷겠다고 했더니 종로 3가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종로 3가에는 3가지 노선이 지나기 때문에 역이 무지하게 크고 복잡하긴 해도 우리가 각자 원하는 노선이 하나씩 있다.


나는 '안국'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이름 덕분인지 이곳에 오면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안국'에 있는 모델하우스에서 우리 가족이 첫 아파트 계약을 했던 좋은 기억도 있다. 나는 Y에게 '안국동'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참 좋다고 했다.


그런데 Y도 안국에서 추억이 있었다.

운현궁을 지나다가 한 학교를 가리키면서 여기서 면접을 봤다고 했다.


Sorita : 그때 생각하면 떨리겠다 그치? 면접에서 떨어지면 필기 다시 봐야 하잖아
Y : 음... 오히려 덤덤했어요. 필기 점수가 워낙 높아서 다들 면접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거든요
Sorita : 넌 맨날 운 좋게 시험 붙었다고 해서 턱걸이로 붙은 줄 알았는데?
Y : 시험지에 아는 문제만 나왔던 것이 운이 좋았던 거죠


Y가 면접을 봤던 그 건물의 그 층을 우리는 서로 바라봤다.

그 건물 바로 옆에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있는데 비슷한 장소에 각자의 이야깃거리를 우리는 가지고 있었다.


4시간 남짓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얘기를 들었다.

Y는 내가 사원에서 대리로 가는 동안 겪었던 성장통을 수월하게 넘기고 있는 것 같았다. 무던하게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욕심이 많은 Y는 내가 현재 속한 조직에서 포기해버린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에 안주하고 평탄함만을 바라며 '오늘도 무사히' 일만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2021년의 어느 늦가을 저녁에 안국에서 익선동길을 지나 종로3가역에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1년 늦가을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