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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Nov 01. 2021

2021년 늦가을 산책

백신 2차 접종까지 마친 후 기운 내서 바람 쐬러 간 이야기

10월 말에 백신 2차 접종까지 마쳤다.


백신을 맞고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의 뉴스를 들으며 이게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을 많이 먹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백신을 예약했고, 그 날짜에 내 왼팔을 누군가에게 내밀고 결과는 운명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그러다 보니 백신 1차를 맞기 전까지 카운트다운을 세면서 매일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살았다.


추석 연휴 동안에도 집 근처 작은 병원에 잔여 백신이 있으니 원하는 아무 날짜에 모더나를 예약하라는 문자가 매일같이 왔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냉장 상태로 백신 보관이 좀 더 철저할 것 같고, 화이자와 모더나 단어를 헷갈려하지 않을 좀 더 숙련된 간호사가 있는 집 근처 대학병원에 가서 일정대로 주사를 맞았다.


1차는 가볍게 지나갔다. (1차만 맞고도 항체가 형성되는지 궁금해서 2주 뒤 검사를 해 봤는데 약하긴 하지만 양성 표시가 나타났다)

그리고 4주 뒤 2차를 맞고 3일 동안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다. 

주사 맞고 3일 때까지 가슴을 꽉 조이는 속옷을 24시간 착용하는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차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엄청난 피로함에 어린이처럼 10시에 잠을 잤다. 이 정도로 숨이 차고 피로해서는 남은 인생 동안 유산소 운동은 다시 못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 4일째 되는 날부터는 평소와 다름없는 컨디션을 회복했다.


궁금했다.

정말 호흡이 제대로 돌아온 건지 회사 출퇴근하면서 맥박을 재 봤지만 정상이었다. 나는 그 주 일요일에 인왕산 둘레길을 걸으며 몸 상태를 한번 더 확인해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인왕산 바로 아래에 있는 40년 정도 된 아파트다. 이 아파트를 보니 어렸을 때 내가 살던 관사가 생각나더라.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겟지만 서울 시내는 내려다보이니 좋겠다


따뜻한 가을 날씨에 거리두기도 완화가 되어서 그런지 길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인왕산을 올라가면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그들을 피해서 혼자 샛길로 빠져나왔다. 인왕산은 대학 때부터 혼자 산행했던 곳이라 길을 매우 잘 안다고 생각했다. 샛길을 혼자 씩씩하게 걸으며 마스크도 벗고 대자연을 만끽하는 그 순간 뜬금없이 산에서 신발을 발견했다!


산에서 누가 가지런히 구두를 벗어둘까? 예전에 영화에서 자살할 때 사람들이 신발을 벗어둔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서 근처에 시체가 있을까 봐 깜짝 놀랐다


혹시나 몰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사람 한 명도 없었고, 사람처럼 생긴 그 어떤 것도 나무나 땅에 있지 않았다. 순간 무서워서 들어왔던 길로 다시 뛰어나가는데 내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 꽤 깊이 들어왔구나 싶었다. 저 멀리 내 또래 등산하는 여자들이 보여서 얼른 뒤따라서 일행인 척 걸었다. 그때 마침, 다음 날 Y랑 어디서 만날 건지 내가 보낸 카톡에 대한 답이 와서 나는 이 사진을 그에게도 보냈다.


Sorita : 인왕산 왔는데 샛길에서 신발 두 짝 발견했어
Sorita : (사진)
Y : 헉, 뭐지??
Y : 제가 알아볼게요
Sorita : 뭘? 신발 주인을?
Y : 아뇨, 우리 갈 식당요


사진으로 신발을 다시 보니 하루 이틀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예상치 않게 낡고 닳을 대로 닳은 신발을 본 후로 마음이 찜찜해져서 나는 산행을 멈추고 돈의문 박물관 쪽으로 내려왔다.


돈의문 박물관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한양도성이 있어서 도성 따라 걷는 재미가 있다.


옛날 화장실 터다. 깊이가 얕은 것을 보니 볼일 볼때마다 하인이 일일이 치울 정도의 짬이 되는 대감댁이었던 듯 하다. 한양도성에는 도성을 쌓은 사람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돈의문 박물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듭짓기, 도자기 만들기 등등 돈을 내고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중간에 배가 고파서 보양식으로 복국을 먹었는데 너무 건강식이라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나 빼고 전부 어르신들이 자리에 계셨다


내가 좋아하는 정동길로 들어왔다.

낙엽이 떨어지는 이 길을 걸으니 이상한 신발을 본 기억도 다 잊혔다. 정동길에는 오래된 건물과 건물터가 많다. 파란 기와집 다음으로 눈에 밟히는 붉은 벽돌 건물들도 참 좋다.


1930년대 미국 싱거미싱회사 사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부터 추방되었고, 광복 후 다시 싱거미싱사가 사용하다가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었다


1930년대까지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관공서를 지을 때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민간 건물인데도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사용했으니 정동길에 왔다면 이 건물은 꼭 구경하고 지나가야 한다.


정동길에 오면 나는 항상 이곳에서 집에서 먹을 원두를 구입한다.



커피를 가베로 부르던 과거에는 융드립으로 커피를 내려서 마셨다고 한다. 3천원에 마실 수 있어서 도전해봤는데 은은한 커피향이 좋았지만 커피가 미지근한 점이 아쉬웠다


백신 2차 접종까지 끝나서 오랜만에 카페에 들어와 마스크를 벗고 커피를 마셨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입 마시고 마스크 착용하기를 반복하다가 급기야 원샷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별다방에서 벌써 크리스마스 음료가 나온 것을 보니 올해도 정말 다 갔구나 싶은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크다. 하지만 백신 맞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회복력이 빠른 편에 속한 것 같아 건강하게 낳아주신 엄마를 포함하여 모든 것에 감사하다. 오늘 하루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인데 내년이 오기 전까지 2021년을 좀 더 알차게 마무리하고, 회사나 사람에 있어서 더 내려놓음으로써 쓸데없이 걱정하고 스트레스받는 일에 시간낭비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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