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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r 14. 2020

꼬마의 꼬마 이야기

꼬마가 꼬마에게

꼬마는 오늘도 까치발을 하고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키가 작아서 창틀 너머로 밖을 겨우 쳐다볼 수 있었던 꼬마는 건너편 빌라 앞에 얼굴을 반쯤 가린 선글라스를 쓰고 군복을 입은 아저씨를 숨죽여서 보고 있었다. 그 아저씨를 발견한 게 여러 번이다 보니 꼬마는 이 아저씨가 꼬마를 잡으러 왔다고 생각을 했다. 그 아저씨가 꼬마를 보고 환하게 웃자 꼬마는 부끄러워서 커튼을 온몸으로 칭칭 감고 숨었다.


짧은 머리에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군복을 입고 나타난 그 아저씨를 엄마는 항상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되고,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어서도 안된다고 했다. 꼬마가 놀이터에서 혼자 흙장난을 하고 있을 때 아저씨는 웃으며 꼬마에게 비닐봉지에 과자를 가득 넣어서 꼬마의 작은 손에 쥐어 주고 돌아갔다. 꼬마는 맛있는 과자를 사주고 혼자 노는 꼬마에게 말을 걸어준 그 아저씨가 아빠보다 좋았다. 어느 날부터 매일매일 그 아저씨가 오기만을 꼬마는 기다렸다.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면서도 주위를 둘러봤고, 창가에는 밖을 쳐다보기 위한 의자가 항상 놓여 있었다. 엄마 손잡고 시장을 가면서도 가끔 보이는 군인들을 볼 때면 꼬마는 아저씨로 착각을 했다. 꼬마 눈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전부 아저씨로 보였다.


이제 꼬마는 아저씨를 보면 바로 달려가서 안겼다. 아저씨는 그 누구보다도 꼬마를 높이 들어서 안아주었다. 아저씨가 항상 서 있던 구멍가게에 같이 들어가서 꼬마는 먹고 싶었던 콘칩과 꼬깔콘을 집었다. 아저씨는 꼬마가 과자를 먹을 동안 옆에 앉아서 꼬마의 집 쪽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꼬마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꼬마가 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꼬마가 가지고 온 과자 봉지를 얼른 정리를 했다. 그리고 꼬마에게 아저씨와 과자를 먹을 때 속옷이 보이지 않게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앉아서 먹으라고 당부를 했다.


얼마 뒤 꼬마는 이사를 가게 됐고 꼬마는 그날 엄마의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됐다



H는 사관생도였던 K를 소개팅으로 만났다. K는 진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H를 위해 버스를 타고 주말마다 내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주로 진해 군항제에서 데이트를 하며 서로 결혼까지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H의 기대와는 다르게 K의 연락은 뜸해졌고 급기야 실망한 H는 K가 마지막으로 선물을 줬던 레코드판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1년 뒤 H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IMF가 오기 전까지 박봉에 비인기였던 직업을 가진 남자와 살면서 H는 가난의 무게를 버티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이 둘을 바라보며 H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느 날, 보통 때처럼 아이 한 명은 업고 또 한 명은 유모차에 태우고 시장을 가려고 나서던 중 군복을 입은 K가 집 근처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도망치듯 집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화장도 못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모습을 H는 보여주기 싫었다.


얼마 뒤 H는 남편의 발령을 따라서 이사를 가게 됐다. H는 희망이 없던 삶 속에서도 종종 찾아와 주던 K를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보며 마음의 위로를 받았었다. 각박한 삶 속에서 다시 혼자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에 H는 얼마 되지도 않는 이삿짐을 다 싣고 마지막으로 집 주변을 둘러보며 떠나기 전 눈물을 터뜨렸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고단한 삶을 꿋꿋하게 버텼던 H는 고등학생이 된 한 아이가 사관학교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밤 9시 30분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10시 30분이면 아이가 체력 시험 준비를 위해 운동장을 뛸 때마다 H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 주위를 크게 감싸고 있었던 나무는 벚꽃나무였다. 가로등 밑에서 아름답게 피어있던 벚꽃을 보며 진해에서 K와 벚꽃 축제를 갔던 그때를 떠올렸다.



K는 H를 보기 위해 거의 매주 진주에 내려갔다. 4학년이라서 주말 외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H와 연락을 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면 H의 아버지가 매번 전화를 받아서 매섭게 끊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집전화 대신 H의 학교로 편지를 보내서 H와 진주에서 만났다. 소위로 임관한 후에 H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K는 진주에 내려가서 H가 좋아하던 음악 레코드판 하나를 선물해 주며 기다려 달라고 얘기를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학교 졸업 후 부대에 적응을 하면서 생각보다 시간은 길어졌다. H와 소식이 끊겨서 어쩔 수 없이 H의 집에 전화를 다시 걸었을 때 H의 남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남동생은 H가 이미 결혼을 해서 I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I는 서울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H는 이미 아이 둘이 있는 엄마였지만 그때 왜 본인이 빨리 돌아오지 못했는지 얘기만이라도 H에게 전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H는 단 한 번도 K를 만나기 위해 밖을 나선 적이 없었다. 먼발치에서 2층에 살고 있는 H의 집을 바라보다가 매번 허탕을 치며 서울로 돌아가면서도 시간이 나면 항상 I에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에 찾아간 H의 집 창틀에서 자신을 숨어서 쳐다보고 있던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다음 날 밖에서 놀고 있던 그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몇 살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하기에는 아이는 너무 어렸다. 아이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나이를 얘기했다. K는 항상 아이에게 과자를 사줬고 아이가 직접 고른 과자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과자를 채워서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 봉지 안에 편지를 넣어서 아이를 집 앞에 데려다줬다. 비록 답신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지만 K는 이렇게라도 H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다시 H의 집을 방문했을 때 흙장난을 하던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집도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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