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많고 많은 도시 중에 어쩌다가 나는 홍콩을 선택했을까
‘낭만’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본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분위기나 감정을 중시하는 태도나 성향‘
사전적 정의는 건조하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에게 홍콩은 낭만이었다.
왕가위 감독과 장국영 배우가 만든 영화들을 보고 홍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본 영화는 ’패왕별희‘였다. 이 영화를 통해서 장국영이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홍콩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패왕별희‘는 홍콩을 참 많이 닮은 영화이다. 화려한 색감과 미장센, 그리고 장국영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까지. 조금은 혼돈스럽고, 혼란스러운 정체성.
창문을 열면 사막의 모래가 보이는 생활을 하던 중에 나는 불현듯 화려한 색감을 쫓고 싶어졌다. 내가 지내온 중동은 색이 지나치게 단조로웠다. 바깥에는 연갈색의 땅과 사계절 없이 일년 내내 쨍쨍한 푸른 하늘. 그리고 무슬림들이 입는옷. 남자는 하얀 디스타샤를 입었고 여자는 까만 아바야를 입었다. 걸어다니는 흑과 백, 그리고 절대 변하지 않는 땅과 하늘. 단조로웠던 색감만큼이나 모노톤의 일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그건 지루한 색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홍콩으로 이직을 고민하면서 나는 자주 ’패왕별희‘에 나오는 장국영의 경극 분장을 생각했다. 그 영화를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영화를 시작으로 홍콩 영화들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중동은 늘 햇빛이 쨍쨍하기 때문에 우울할 틈도 없었다. 영화 속 홍콩은 화려한 장면 속에 고독함이 엿보였다. 그게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곧 낭만이었다.
홍콩에 오고서야 깨달은 점이 몇 개 있다. 다른 간지나는 미국 킬러들과는 다르게 홍콩의 킬러들이 좋은 옷을 안 입고, 좋은 음식을 안 먹는 이유가 있었다. 물가가 너무 비싸다. 내가 생각한 낭만은 이 살인적인 물가 앞에서 철저히 패배하고 말았다.
나는 술 중에서 와인이 가장 낭만적이라고 생각 한다. 일단 잔이 아름답고 어느 장면에나 갖다놔도 어울리기 때문이다. 상상해본다. 욕조 안에서 와인잔을 든 내 모습과 소주잔을 든 내 모습. 다른 잔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투박한 위스키 잔이나 다른 맥주컵을 떠올려봐도 역시 와인잔을 든 내 모습이 가장 낭만적이다. 하지만 홍콩집에서 욕조란 사치 그 자체이다.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기에 그들은 집을 작고 높게 만든다. 이러다 하늘 끝에 닿는건 아닌지, 가끔 높은 건물들을 보다 보면 위압감이 든다.
욕조는 없지만 낭만은 포기할 수 없다.
4평 남짓한 공간, 옷장도 없이 매트리스와 책상 하나로 채워진 집. 그 안에도 낭만은 존재한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재료들을 할인 받아 사고, 안주를 만들고 와인을 마신다. 와인잔에 붉은 빛 와인이 차오를 때면 내 낭만도 살아난다. 내 안에 색감이 채워진다.
나는 이따끔 생각한다. 낭만이란 참 불편한거라고. 그리고 훗날 돌이켜보면 이 불편함을 그리워할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