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의 재질

기내에서 살아남기(1)

by 여름소녀


무디어지다; 1. 칼이나 송곳 따위의 끝이나 날이 날카롭지 못하게 되다.

2. 느끼고 깨닫는 힘이나 표현하는 힘이 부족하고 둔하게 되다.

3. 솜씨 따위가 둔하게 되다.


‘무디어지다’라는 단어는 낯설다. ‘무뎌지다’는 ‘무디어지다’에서 나온 단어이다. 나는 어쩐지

‘무뎌지다’라는 단어에조차 무뎌진 사람같다.


기내에서 서비스를 하다 보면 ‘무딘 사람’과 ‘무뎌진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직 무뎌지지 못한 사람’도 볼 수 있다.

‘무뎌진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례한 말에 점차 익숙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다. 무례한 말이 바늘이라면, ‘무뎌진 사람’은 살짝 뭉특해진 바늘로 콕콕 찔려지는 것과 같다. 아프지만 덜 아프다.

반면에 신입 승무원들을 보면 아직 무뎌지기 전이라, 바늘의 날카로움을 그대로 받아드린다. 그럴때 선배들은 말한다.

’일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

나는 그 시간이 업무보다도 감정이 무뎌지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무뎌질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아주 말랑한 심장이었다. 말랑말랑한 심장은 뜨겁고, 있는 그대로를 다 받아들인다. 무례한 말을 매일 맞닥뜨리다 보면, 뜨거웠던 심장은 서서히 식는다. 성에가 끼고, 점점 단단해진다. 하루에도 몇번씩 심장은 온탕과 냉탕을 왔다갔다 한다. 하지만 이 차가운 심장에도 특징이 있다면 따뜻한 온도에는 금세 녹는다는 것이다. 승객의 작은 호의와 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심장은 무장해제가 된다.


‘무딘 사람’은 심장의 재질이 다른 것 같다. 고무공으로 만든 심장 같다. 상처를 안받지는 않지만 회복 탄력성이 좋다.

내가 부러워 하는 건 바로 ’무딘 사람‘의 심장이다. 상처에 무감각해지고 싶다가도 최소한의 감정은 느끼고 싶다. 무감각해진다는 건 상처로 부터 나를 구할 수 있지만 어쩐지 인간적이지 못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이 일을 할 때마다 놀란다.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타인의 마음을 상처 입히는지. 그리고 생각한다. 얼마나 단단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어야 이 일을 할 수 있는건지. 비행을 한 지 이제 6년째, 서비스 경력까지 치면 어언 10년차 이다. 왠만큼 단단해졌고 무뎌졌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씩 훅 들어오는 무례함과 상식 밖의 행동들은 여전히 나를 흔든다.


무례한 승객을 응대하는 신입 크루를 본 적이 있다. 하나 하나 내뱉는 차가운 말들이 그대로 그 신입크루의 심장에 박힌 모습이었다. 잔뜩 얼어붙은 채 한마디도 못하던 그 크루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중에 그 크루한테 괜찮냐고 물어보자 간신히 괜찮다고 대답하던 그 한숨같던 한마디도 기억한다. 안타깝게도 고무공 같은 재질의 심장이 아니었나보다. 그는 비행을 마치고도 약간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무뎌지지 못해서 그만두는 크루들도 많이 본다. 넋이 나간 크루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 크루의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졌길, 그래서 다음번 무례함엔 조금 더 무뎌지길 혼자 기도했다.


무디어지는 건 슬픈 일 같지만, 때로는 그게 우리를 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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