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에서 살아남기(10)
사랑에도 온도가 있을까.
며칠 전 실연을 당한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그런 말을 했다.
짧지만 ‘불’같은 사랑을 했다고. 활활 타오르듯이 뜨거웠다는건가? 그리고 언니는 말했다.
그 전 연애는 미적지근 했었다고. 그럼 그때는 어떤 온도 였을까? 같은 사랑인데도 온도가 다른다는 건 뭘까.
얼마 전 프랑크프루트로 비행을 다녀왔다. 모두가 술을 원했고 모두가 취해갔다. 술이 또 다른 술을 부르는 승객도 있었고, 한 잔 마시자마자 곯아 떨어지는 승객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술이 들어 있던 크루들의 카트는 텅텅 비어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카트를 보면서 이래도 되나 라는 걱정이 들 때쯤 서비스가 끝이 났다.
크루들 모두가 녹초가 되어서 허겁지겁 배를 채우러 갔지만 나는 면세품 담당이어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빨리 마무리 짓고 들어가서 한숨 돌려야지 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승객이 비틀거리며 내가 있던 갤리로 걸어왔다. 그 때 모든 크루가 뒷갤리로 가있던 상태라 중간 갤리에는 나 혼자 였다. 그는 나에게 속이 안 좋다고 했다. 희미하게 술냄새가 났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화장실로 가라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내 앞에서 토를 쏟아냈다. 나는 분명히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이건 마치 영화 ‘베놈’의 한 장면 같았다. 바닥에 쏟아낸 것들을 보니 오랜만에 비행멀미가 올라왔다. 인도 크루가 나를 데리러 왔다가 그 상황을 보고 도망 가려고 하길래 붙잡았다. 토사물을 치우는 키트가 따로 있는데 내 갤리에는 없어서 그 친구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그 친구가 키트를 찾아 돌아 올때까지 어색하고 애매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 남자도 당황한 나머지 내게 계속 사과를 했다. 사실 비행을 하면서 토는 여러번 치웠었다. 근데 이제 다른점은 나에게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좌석에 토를 하고 나에게 명령하듯이 치우라고 하는 부모도 꽤 여럿 봤었고, 복도나 좌석에 토를 하고 나에게 와서 자기가 토를 했으니 와서 치우라고 하는 승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쩐지 나도 그게 내 업무 중 하나라는 생각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그런 날은 운이 좀 없었다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이 승객은 내 앞에 서서 연신 사과를 하고 서있었다. 승객의 옷부터 닦아주려고 내가 휴지와 타울을 가져와서 건네자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 자신의 옷이 아니라 바닥부터 치우려고 주저 앉았다. 내가 치울테니 옷부터 닦으라고 말을 하자 그는 여전히 어쩔줄 몰라했다. 마침 인도크루가 키트를 가져왔길래 나는 바닥에 가루를 뿌리고 액체들이 굳어 고체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옷을 닦으며 본인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우리 회사 크루와 연인관계였는데 몇일 전에 헤어졌다고 했다. 상실감에 술을 마셨고 그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슬퍼보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한 것 같아 난장판을 치우면서 이야기를 들어줬다. 이야기를 마치고나니 그제서야 조금 편안해보였다. 내가 바닥을 다 치우고나서도 그는 미안한 마음에 갤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등 떠밀어 자리로 돌려보내놓고 나니 문득 나는 그가 어떤 사랑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 그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어떤 온도의 사랑을 했을까? 난장판을 치우느라 그 긴 비행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나는 왠지 그가 밉지 않았다. 사랑을 했던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었길, 괴로웠던 마음은 그 날 그 갤리 바닥에 다 토해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또 살아내길. 예의바르게 취한 승객은 처음이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그를 무한히 응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