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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Jun 29. 2016

 나쁜 소녀의 짖궂음

또다른 꿈 이야기

그날 꾼 또다른 꿈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쁜 소녀의 짖궂음>은 심장이 아픈 사랑이야기다.

어떤 작가이든, 글을 제대로 쓸 줄 알게 되면, 자신의 유년을, 자신의 청년을 다시 살아내려 한다. 

자신의 시대와 공간을 복기하고, 모든 이들의 가슴에 남는 아픈 역사적인 사건을 뒤쫓아 다닌 후에도,

참을 수 없는 대담한 계획이 있다면, 자신이 상상한(사실은 내적으로 경험한) 연애의 원형을 체험하는 인물들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순수박물관>의 주인공이 한 여자와의 사랑을 위해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 젊음을 그려냈다면, 그와 비슷한 강박적 사랑을 다룬 <나쁜 소녀의 짖궂음>은 한여자를 소유하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착한 소년의 이야기다. 사랑하는 한 여자만을 사랑하기 위해 다른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았지만, 착한 그는 사랑이 아닌 어떤 방법도 쓸 줄 몰랐다. 그의 삶은 그저 사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 안의 주제가 있다면, 그녀와의 모든 일들, 사랑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찢어질 듯한 고통과 배신감을 주더라도, 그는 그것을 마음대로 조종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두 번 울컥했는데, 한번은 벙어리였던 일랄이 말을 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와 주인공이 나쁜 소녀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나타나더라도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 에 없다는 고백에서였다.

나는 당연히 어떤 사랑을 떠올렸는데, 그 사랑의 반대편에서 경험하는 사람으로서 사랑이 주는 고통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때론 세포와 세포간의 거리는 영원하다. 우리는 소통하지만 영원히 타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입으로 너의 혀를 느끼지만, 너의 혀에 닿는 내 온도를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닐 때가 있다.  사랑은 두 사람을 이어주지만, 그 경험은 하나일 순 없다. 자유로운 세포가 나쁜 소녀처럼 자기애와 미숙함의 가루를 날리면서, 제멋대로 날아다닐 수도 있다. 그 날개짓까지도 그냥 보아주는 사랑을 해내는 착한 소년의 모성적인 사랑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어떤 감정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체한 것처럼 그 감정이 나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찾아간 만난 젊은 나는 행복해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더이상 내가 아니다.

젊은 나는 착하기만 한 그녀였는데, 늙은 나는 뻔뻔스런 그녀가 되버린 것 같았다. 그래, 오랜 시간 배신당한 나는 결국 변질되었다. 나를 보는 눈이 안에서 바깥으로 나와버렸다. 그것은 현실적이 되었거나, 성숙해진 지표일수도 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성숙하지 못했으면 행복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더이상 분노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연민의 마음이 되어야

나는 진정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신 그 집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겠지.

젊은 그녀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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