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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Apr 01. 2024

순간의 영원

에세이 : 계속 적어내는 것

햇빛을 대신해서 달빛이 내려앉던 어느 날 밤.  

그 고요한 빛 아래 사람들은 이름 모를 이파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로 나란히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의 퇴근 시간이 지난 퇴근길의 버스 안.

문득 책을 읽다가 훅! 하고 코를 찌르는 술 냄새가 책 속에 파묻혔던 내 정신을 깨웠다.

갑자기 들이닥친 예상치 못했던 술 냄새는 정신을 깨우는 동시에 불쾌감으로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금방 옅은 흔적만 남기고 지나간 냄새의 짧은 여백에서 어렴풋한 사연이 떠올랐다.


오가는 사람들 속, 다양한 냄새.


한숨에 섞인 술 냄새.

옷 위에 앉아있는 고기 냄새.

조금씩 식어가는 치킨 냄새.


빈 속으로 늦게 퇴근하는 내 빈약한 위가 다시 움찔거렸다. 꼬르륵 비명을 지르다. 이내 체념한다.

한참 읽던 책을 덮었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옛 기억을 눈앞에 널려있는 풍경 위에 옅게 그려본다.


술에 잔뜩 취해 버스 종점까지 갔던 일.


거하게 서울에서 술을 마시다. 막차를 타고 잠을 청했다. 종점에서도 좀처럼 깰 생각을 하지 않던 나를 기사님께서 조심스럽게 불러 깨웠다. 순간 바짝 술이 깨고, 짧게 걱정과 우려를 담은 인사말을 건네받았다. 나는 괜찮다며 서둘러 죄송하단 말을 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었다. 유독 어두웠던 겨울밤. 허탈하게 웃으며 한 시간 넘게 가로등도 없는 깊은 산골을 걸어 내려오며 자책과 같은 생각을 했다. 서른이 가까워져도 스무 살 남짓의 어린 시절과 별반 다를 것이 없구나. 나는 언제쯤 철이 들까. 가로등도 없던 어두운 길은 책의 공백처럼 담지 못한 글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걸어왔던 기억이었다.


술냄새가 지나가고 옷 위에 앉은 고기 냄새가 내 코를 건들였다.


하하 호호 웃으며 양껏 고기를 먹고 버스를 타던 날이 떠오른다.

코트에 베여버린 깊게 고기 냄새에 눈치를 보며 옷소매 끝을 몰래 킁킁거렸던 나의 모습. 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까봐. 작은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이 고기 냄새를 다 들여 마셔버리면 냄새가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기억은 냄새 같았다.

아니 향기라고 하는 편이 좋을까? 냄새는 좋지 않은 이미지니까. 흠. 아무렴 어때.


코를 찌르던 술 냄새로 나의 예전 기억이 피어오르고 곧 사라졌던 방금처럼.

훅 들어왔다. 점차 옅어지는 모양새가. 그러다 곧 잊히는 그 모든 과정이 기억 같았다. 순간을 기억하고, 순간 잊어버리는 기억.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과 무뎌진다는 사실이.

피어오르다 이내 익숙해지고 사라지는 것이.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을 묶어두기 위해 글을 적는 것일까. 먼지 쌓인 기억들을 끄집어내 어렴풋하게 비슷한 냄새를 닮은 글을 쓰고, 그것도 모자라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것일까. 혹은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글을 종종 적어내면서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내가 좋아하던 것들은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덜 좋아지고, 어느새 그 자리는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는다. 다시 처음 좋아해 본 것 마냥 열망을 불태운다. 웃고, 찾아다니고, 사랑한다며 떠들고. 그리고 다시 잊고. 감정은 변한다.

하지만 지나간 순간은 어느 날 문득 다시 내게 찾아오고, 지나간 감정은 타인의 감정처럼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불같이 사랑했었는데. 옅어지는 그 감정이 너무 아쉬워 글을 적는다. 또 잊힐까 봐. 영원히 내게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움에 글을 뱉어낸다. 두서없이 적어낸 고르지 못했던 글들 어떤 걸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흐릿한 글에서 이상하게 감정만은 명확하게 느껴진다.

정리도 못할 만큼 복잡하게 다채로웠다고, 모든 모순의 단어들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며, 이름 모를 사랑을 표현한다. 나는 지금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혹은 슬프다고 외치는 지난날의 나.


그 순간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아서. 잊히는 감정이 벌써 그리워서 글을 뱉어낸다. 거르지 않고, 꾸미지 않고, 다듬지 않는다.


그렇게 기억의 영원을 염원하며, 욕심으로 가득 찬 글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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