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나는 오늘도 내일도 글을 쓴다
오늘은 어떤 글을 써볼까. 싶은 찰나에 내 글은 거짓과 진실이 마구잡이로 섞인 소설이 대부분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오늘은 일기를 써보기로 한다.
가끔 생각의 날 것을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의 글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 중에 말로 뱉지 못하는 감정과 생각들을 글로 써 내려가지만, 그것에 색을 입혀 꾸며 적는 것과 날로 적는 것은 다르다.
살아가면서 가장 나은 순간이 항상 ‘오늘’이 된 것은 크게 오래되지 않았다. 한 2년 전? 그전까지의 나를 그려보자면, 길을 걷다가도 숨 쉬는 법을 까먹어버리거나 깊은 밤과 함께 찾아온 숨겨뒀던 감정에 나를 잃어버리기도 했었으니까. 사람이 싫었고, 사람인 내가 딱히 좋지 않았다. 과거에 나를 묶어두고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나를 어여뻐했다. 삶을 단단히 살아가는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고, 동시에 미웠다. 내가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진 이들을 질투했다. 알 수 없이 꼬여버린 생각들은 다시 나를 묶고, 외면하고 싶던 과거를 끌고 왔다.
모순이 가득한 것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멋진 말로 삶을 꾸며대는 이들을 처연하게 여기거나 비웃었지만, 그것이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처럼.
언젠가 나의 모순들은 직면했던 때가 있었다. 아주 날이 좋았고, 창 너머에선 친구들과 기쁨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늦은 오후, 부스스한 머리로 세수조차 미루고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치미는 감정에 펑펑 울었다. 처음 마주한 감정이었다. 아주 평화로웠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나의 방에서 내가 뱉어낸 울음소리와 섞여 내 귀에 담겼다. 행복했고, 동시에 아파왔다. 타인의 웃음소리에 기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어봤다. 부러웠고 부러웠다. 소소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뱉어내는 이들이 가슴이 저리게 부러웠다. 질투가 없는 부러움을 이름도 모르는 이들에게서 배우고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창피한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더 이상 나를 꾸미려 들지 않았고, 나를 낮추지 않았다. 사람들과 나 사이를 재단하지 않기 시작했던 그 시발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세상이 나에게 대하는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저 기대를 접어가며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배워갔다. 물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바뀌는 사람들. 태도가 바뀌는 사람들. 상처 주는 사람들은 여전하고 꾸준했고 나는 그것을 마주해야 했다. 그것들에 마음이 아프지만 고개를 똑바로 들어 두 눈으로 담아냈다. 울었고 아팠다. 하지만 그것들을 ‘괜찮다’라는 말로 덮어두지 않았고, ‘속상하다. 아프다.’라며 불행을 기회 삼아 날로 뱉어 내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 연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습관으로 자리 잡혔고, 나는 여전히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 연습을 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비슷했고, 나도 비슷했다. 달라진 것은 고작 현실은 직면한다는 것뿐. 아프면 아프고, 행복하면 행복해한다. 그 이상 꾸미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떠오르는 감정을 참지 않고 뱉어 낼 수 있게 되면서 나는 나의 감정을 존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나를 존중하는 만큼이나 타인을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을 존중한다는 것이 꼭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아픔을 고스란히 말할 수 있고, 남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게 되면서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 빨라졌다.
여전히 예민한 나는 수없이 상처를 받고 종종 운다. 혹은 울지 못한 채 잠에 들곤 한다. 꿈까지 쫓아온 아픔에 잠에서 일어날 때도 있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글에 담고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쌓인 글들과 그림이 쌓여있다. 나의 감정과 기록을 뱉어 다른 것에 담는 작업은 마음이 시큰거릴 정로도 아프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속이 시원하다. 글은 나를 오해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니까. 당시에 적었던 감정들을 그저 담아주기만 해 주니까.
나를 지나치는 수많은 이들이 아쉽고 상처를 준 이들 또한 밉기도 하지만, 그들도 그들만의 이야기를 담고 살아갈 것을 알기에 나는 그대로 보내주기로 한다. 나 또한 글과 그림처럼 타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글을 적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