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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만혜서 Jan 29. 2023

식물인생

삶이 폭발하는 것을 상상해보았는가? 내가 그런 상상을 했던 날이 떠오른다. 나는 우수수 오가는 학생들 사이를 피해 가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한 발짝 남겨두고 죽음을 생각했다. 어떤 차가 냅다 나를 들이받아버리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잠깐 이런 다짐도 했다. 40살에 생을 마감하기로. 상상은 잠시였다. 21세기가 태연히 시작되었듯이 나의 삶도 계속되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와 죽지 않는 인생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첫 번째로 떠올린 이유는 슬픔을 덮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크고 작은 슬픔이 생긴다. 강아지가 젖은 꼴로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기억, 아빠가 경운기에 매달린 마지막 순간, 친구에게 010을 뺀 번호로 험담을 보내어 울었던 책상, 혼주석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내 결혼식을 바라보는 엄마. 슬픔을 온전히 이겨야 할 땐 차라리 세상이 망했으면 싶었다. 슬픔의 자국은 꽤 오래 남았다. 그 감정에 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더 큰 사건을 마주하거나 다른 행복으로 덮었다. 그렇지만 슬픔을 쌓아간 인생은 서글프다. 참사 생존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슬프지 않은 날을 모두 행복한 날이라고.


씀 에세이 마감인 어제, 나는 글을 쓰지 않고 남편과 밖으로 나섰다. 강변을 함께 걸으며 계속해서 질문했다.

"오빠는 왜 죽지 않고 살고 싶어? 사는 이유가 뭘까?"

만약에로 이어진 질문 끝에 남편이 답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는 거 아닐까?"

실체 없는 그럴듯한 대답이 나왔다. 철학적인 고민을 하다 보니 방구석 철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항상 오늘만. 현재만 충실한 나와 잘 어울리는 답변 같았다. 설명하기 힘든 걸 말하기 위해서 우린 '만약에'라는 가정을 끌어 왔다. 만약에 내일 죽는다면, 만약에 99살에 내일 죽는다면, 만약에 살아남으면 500억이 생긴다는데 죽을 거냐, 만약에 지진이 나면 자연스럽게 죽을 건지 열심히 살아날 것인지. 삶의 이유를 미래에서 찾고 있었다.


최근에 로즈메리와 애플민트 화분을 사서 키우고 있다. 나는 그 식물들이 머지않아 시들어 쓰레기봉투에 들어갈 운명인걸 직감했다. 여태 그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들여온 지 일주일 만에 벌써 이파리들이 말라 떨어졌다. 역시나가 역시나다. 눈길을 자주 주고 물을 적당히 주어도 내 곁에서는 죽어 버린다. 나는 왜 죽을 식물을 자꾸 사게 되는 것인가. 내 삶의 태도와 닮아 있다. 허무한 희망일지라도 계속 시도하는 것. 딱 식물의 죽음만큼만 슬퍼하고 다시 다음을 사는 것. 시든 끝맺음보다 연둣빛의 새싹을 더 크게 간직한다.


혼자서 걷지 못해 경운기에 다리를 맡겼던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에게 살아야 할 이유는 술이었을까? 자식이었을까? 자기 자신이었을까? 걷지 못한 날을 헤아리며 본인과 다르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안도하고 떠난 거 같다. 아빠는 나를 사랑했었다. 사진을 보면서 그도 사랑하며 살았다고 안도를 했다. 유치원 생일파티에서 나를 안고 있는 사진. 그 속의 남자는 아빠가 아니라 8촌 오빠였다. 친척을 대신 보낸 아빠의 마음이 보였다. 택시를 타고 지팡이를 짚으며 힘겹게 올랐던 해인사. 지나가는 커플에게 부탁한 가족사진도 아빠의 마음이었다. 이 한 번의 사랑으로 다른 이에게 뿌리를 내렸다. 사랑이 있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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