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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만혜서 May 11. 2023

물에 젖은 건 그냥 말리면 그만


어딘가 멍한 눈, 먹먹한 소리들, 속에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마음 벽을 두드린다. 마침 비도 온다. 빗방울에 미끄러진 차들을 이리저리 피해 미용실 앞에 도착했다. 꼭 배우처럼 생긴 남자 미용사가 앤을 맞이했다. 앤은 미용실 안을 둘러봤다. 차분한 클래식 음악과 하얀 조명, 그리고 설렘. 모두가 편안하게 머리카락을 맡기고 있었다. 3시간 동안 지루하진 않을까 머리카락으로만 앤과 접하던 미용사는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인스타 아이디가 정말 센스 있으시던데요."

 "아. 네"

미용사의 물음에 짧은 대답을 한 후 입을 꾹 닫았다.

앤은 머리를 감겨주는 의자에 누워 생각했다.

'왜 이리 지칠까. 회사일은 왜 잘하면 덕이고 못하면 탓할까. 이 반복을 얼마나 해야 하는 걸까.'

감은 눈 아래에 눈물이 모였다. 앤은 미용실만 오면 생각에 생각을 더해 슬픈 마음을 찾아낸다. 미용실에서 눈물.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무서운 일진 언니들이 긴 머리카락을 문구용 가위로 자른 일,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그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자른 날까지. 앤의 슬픔이 터지는 곳이 바로 미용실이다.

"더 헹구고 싶은 곳 있으세요? 이제 일어나실게요~"

앤은 눈꺼풀 아래에 모인 눈물을 황급히 털어내고 자리로 갔다. 두 명의 미용사가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어지러운 소음 속에서 앤은 들고 간 책을 펼쳤다.

책 제일 뒷장에 이 문장이 쓰여있었다.


"지금 손님의 상황도 세탁기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물에 젖은 수면가운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 잠깐 젖어 있는 것뿐이지요. 물에 젖은 건 그냥 말리면 그만 아닐까요?”


비 오는 날. 젖은 머리카락. 축 처진 마음. 앤은 모든 게 축축하게 잠긴 하루를 위로해주는 글이라 생각했다. 문득 친구가 올렸던 책의 한 구절도 떠올랐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앤에게도 얼마간의 햇살이 필요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축축한 마음은 마르고 바삭한 향기가 나겠지. 긴 비가 그치고 불어오는 5월의 봄바람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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