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미워하고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에 놀라게 될 때
“그러고 보니 언니 요즘은 그 친구 얘기 안 하네?”
“아, 그 사람 안 본 지 좀 됐어.”
이런 대화가 오갈 때가 있다. 사연을 들어보면 특별히 싸운 건 아니지만 어쩐지 서로 눈치를 보게 되거나 불편해져서 거리를 두는 중이라 한다. 친했던 사이였는데 직장이나 직급이나 자산 수준 등 삶의 양상이 바뀌게 되면서 어색해지고 멀어졌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살고 있는 것 같아 SNS를 잘 하지 않게 된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 셀 수도 없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미워하고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에 놀라다가도 언젠가 상대가 삐끗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구정물 같은 심정.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사람 사는 건 다 고만고만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볼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순진함이었다. 90년대 초반까지는 SNS가 없었고 연예인들이 자기 집을 자랑하는 TV 프로그램도 거의 없었다. 부를 자랑하는 건 속물이나 하는 행위로 여겼으며 자수성가한 사람을 칭송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컸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우리는 자신의 생활수준, 취향, 외모를 비교하는 일이 당연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라는 말은 유효기간이 지난 구호로만 들린다.
회사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는 시기가 있었다. 연차가 낮을 때는 직장 상사에 대한 여러 가지 비난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 팀장이 그랬대? 그 과장 장난 아니래, 같은 말들이 약간의 사실에 억측과 과장을 더해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팩트 여부는 상관없는 직장인 전용 유흥이었다.
어느 순간 상황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건 내 연차가 오르고 팀장급으로 승진을 하면서였다. 그즈음부터는 사람들이 내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험담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사람들이 욕하는 대상 중 하나가 바로 나겠구나. 또 다른 사실도 하나 깨달았다. 요즘 회사 안에서 질투하게 되는 사람이 없네?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으니 괜스레 비난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도 흥을 잃고 말았다. 비난의 말은 주파수가 맞아서 함께 진동하는 사람들끼리 기막히게 전해지는 법이다.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는 대상은 나와 수준이나 환경이 비슷해서 공통점이 있는 사람이고,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는 분야는 내가 관심 있고 잘하고 싶은 분야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의 핵심은 ‘사촌’에 있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낼 상속세만 10조를 넘는다는 소식에는 별생각이 없다가 직장 동료가 산 아파트가 5억 올랐다는 말을 듣게 되면 마음이 일그러지는 건 그래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를 들을 때 나는 깊이 감동받고 가수 겸 연기자 수지를 볼 때면 눈을 떼지 못하고 흐뭇하게 쳐다본다. 그러나 어떤 피아니스트는 조성진의 연주가 흘러나오면 귀를 막고 싶어질 것이고 어떤 연예인은 TV에서 수지를 마주칠 때 입을 삐쭉거리며 전원을 끌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질투하는 이는 무언가 되기를 열렬히 원하는 사람이며, 누군가에게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은 이미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뜻도 될 것이다.
류승완 감독이 만든 영화 <베테랑>이 막 천만 관객을 돌파했을 때 최동훈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욕먹는 사람 된 거예요.”
더는 회사 내에 질투하게 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뒤 퇴사를 결심한 건 그래서였다. 사람은 잘하고 싶어 하는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미 이룬 사람을 시기하면서도 그의 영향을 깊이 받고야 만다. 관심이 없다면 시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므로. 내가 회사 안에서 시기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건 그 안에서 무언가 더 이루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편 사람은 질투의 대상을 견제하면서 그 불덩어리를 연료로 성과를 내곤 한다. 나 또한 경쟁자보다 뛰어난 평가를 받기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프로젝트도 거침없이 자진했었다.
조직 내에서 질투심을 잘 다루고 싶다면, 결국 이런 마음의 회로 자체가 동일한 욕망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누군가 너무 대단하거나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본질은 ‘나도 하고 싶은 일을 (나와 비슷해 보이는) 저 사람이 먼저 해냈다’는 것에 속상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우선, 질투하게 되는 상대의 기준을 자꾸 올려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좋다. 질투는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라 할 만큼 사람의 본성이므로 성인聖人이 아니고서야 없앨 수 없고, 다만 그 기준선을 올리는 게 중요하다. 성장하고 싶다면 아무런 자극이 없는 것보다는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 나보다 어떤 면에서든 뛰어난 부분이 있으면서도, 내가 질투를 해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이가 ‘넘사벽’은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신경 쓰는 사람들보다 나를 신경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는 순간도 온다. 이는 한편으로 견제받을 정도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니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 시기에는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질투를 받는 역할로 계속 머물지,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있거나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또 다른 질투를 하면서 따라잡아볼지.
한편 질투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즐기는 장르를 하나쯤은 꼭 가지는 것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된다. 그걸 취미나 취향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잘하지는 못해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활동에 시간을 쓰면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어 잠시나마 정신적 평온함을 누릴 수 있다. 또한 타인의 성취에 함께 기뻐하는 감정도 자기긍정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므로, 질투하지 않을 만큼 다르면서 인격적으로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을 사귀는 것도 좋다. 잘하지 못하지만 잘할 생각도 없는 분야에서 성과를 쌓고 있는 사람을 보면 마음으로 축하해주기가 쉬우니까. 순수하게 누군가의 성공에 축복을 더하는 경험을 쌓을 때 자신의 인격에 마이너스 점수만 주던 일을 멈출 수 있다.
질투의 사용법이란 최고가 되어서 욕을 먹느냐, 최고 뒤에서 험담을 하느냐 둘 중 하나인 듯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동시대에 살면서 비슷한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자극을 받는다는 건 괴로움만은 아닐 수 있다.
앞서 천만 영화를 만들며 욕먹는 사람이 되었다 말한 류승완 감독은 비슷한 시기에 『에스콰이어』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동시대의 ‘넘사벽’ 감독들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들과 친하다고. 솔직히 그들의 페이스메이커로만 가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고. 그들은 영화를 너무 잘 만드니까 ‘난 왜 저렇게 못 만들지?’하는 질투가 난다고. 그들과 함께하면 그런 순간이 항상 있다고.
이처럼 나의 쓰임이 단지 천재의 페이스메이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천만 영화를 만들 수 있고, 우리의 질투심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젖은 손으로 그 위험한 걸 들었다 놨다 반복하지 말고 적당한 변압기를 찾아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