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들르는 단팥빵 전문점이 하나 있어요.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그 옆에 있는데, 한번 거기 빵을 먹어본 아이가 이후로 자꾸만 제 손을 잡고 가게 쪽으로 이끌거든요. 묵직할 정도로 단팥이 푸짐하게 들어 있으면서 달지 않고 자잘한 호두도 아작아작 씹혀 제 입에도 맛있어요. 포장지에 이런 내용의 글이 적혀 있더군요. “어릴 때 할매가 사준 단팥빵과 우유 맛을 잊을 수 없어서 단팥빵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강렬했던 처음의 맛이 있지요. 난 그게 제일 맛있더라, 호기롭게 말하기도 하고 돈 많이 벌면 자주 사 먹을 거야, 하고 귀여운 투지를 다지던 음식이요.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머릿속에 그 분야에 관련된 좌표를 찍어나가요. 여긴 5성급 호텔 뷔페 중에선 상급이군, 중식당 중에서는 탕수육에 우위가 있는 집이군, 하는 식으로요. 취향이 있다는 건 그런 식의 좌표가 상당히 디테일해진 분야가 있다는 걸 의미하죠. 충격적인 첫맛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다시는 그걸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게 굵다란 점을 쾅 어느 지점에 찍는 일.
황당할 정도로 맛있었던 최초의 기억은 KFC에서 시작됐어요. 시내에 가면 메이커 치킨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언니와 둘이 돈을 모았죠. 버스를 탔는데 집에서 30분 정도가 걸렸어요. 서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부분인데, 지방 사람 기준에서 차로 30분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체감의 거리예요. 모든 정류장에 다 서는 게 아니라 내리기 직전 벨을 눌러야만 문을 열어준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때였죠.
닭다리 튀김 하나와 비스킷 하나를 샀어요. ‘통닭’이 아니라 ‘치킨’이라니. ‘과자’가 아니고 ‘비스킷’이라니. 치킨엔 시장표 통닭과 달리 튀김옷에 소보로빵 겉면과 비슷하게 생긴 게 많이 붙어있어 신기했어요.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비스킷이었죠. 보통은 ‘스콘’이라고 불리는 거요. 빵 같이 생기기도 했고 튀김 같이 생기기도 한 비스킷에는 버터와 잼, 플라스틱 나이프가 함께 나왔어요. 버터를 살살 펴서 바르고 딸기잼을 양 손가락으로 눌러서 찌익 바르고 한 입 먹었는데 곧바로 언니와 눈이 마주쳤어요. 부드럽고 달콤하고 짭짤하고 포슬포슬한 맛. 어? 이거 뭐야?
대학생이 되어 크리스피크림 도넛을 처음 먹던 날도 머릿속에서 동영상처럼 재생이 돼요. 전까지 제가 알던 건 ‘도나쓰’였지 ‘도넛’이 아니었어요. 동그랗고 하얀 밀가루 반죽이 풍덩 기름에 떨어졌다가 다시 뒤집히며 튀겨지고 하얀 시럽에 전체가 푹 적셔져 이동하는 걸 유리벽 너머로 봤어요. 매장 전체가 기다리는 사람들 줄로 꽉 차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느라 지루한 줄도 몰랐죠. 마침내 직원이 뭘 시킬 거냐고 했을 때 저는 연습했던 말을 했어요. ‘오리지널 글레이즈드로 한 더즌 주세요.’ 시식을 하라며 도넛 하나를 종이에 싸서 건네주기에 그 따끈하고 보들보들한 걸 받아 들고 한 입 먹었는데요. 과장 없이 말하건대 시간이 잠깐 멈추는 것 같았어요. 이 맛을 가족들에게도 빨리 알게 하고 싶어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급해졌죠. “이게 뭔지 알아? 미국 사람들이 먹는 도넛이라는 거야” 하면서 으스대던 오후가 있었어요.
이후에도 비슷한 경험이 이어졌어요. 피자헛에 갔다가 빵 끝에 치즈와 고구마 무스가 올라간 리치골드 피자라는 걸 처음 먹었을 때, 아웃백에 가서 부쉬맨 브레드라고 불리는 빵에 버터도 아닌 생크림도 아닌 허니버터를 찍어 먹은 뒤 리필까지 된다는 말을 듣고 “몇 개까지 더 달라고 해야 실례가 아닌 거야?” 하고 친구에게 물어본 생일날.
그런 식으로 인식된 새로운 맛은 그걸 주문하거나, 먹고 있는 자신을 전보다 더 좋아하게 했어요. ‘도넛’과 ‘도나쓰’를 구분하게 된 나, ‘아웃백’의 부시맨 브레드는 매장에서 리필이 될 뿐 아니라 집에 갈 때도 인당 하나씩 포장해준다는 걸 알게 된 나, 피자의 끝 부분이 원래 맛없는 부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나.
그런 식으로 분별의 눈이 추가될 때마다 저는 빨리 직장인이 되고 싶다거나, 서울에 가고 싶다거나, 외국으로 여행을 가고 싶단 생각을 했죠. 그러면 더 이상 이런 걸 먹을 때마다 과도하게 감격하거나 주문할 때 긴장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이런 데 오기 한참 전부터 고대하고, 기념할 일이 있을 때만 와서 먹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때나 아무렇지 않게 먹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호들갑 떨지 않고 덤덤하게 먹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그런 맛들은 저에게 하여금 선망하게 하면서 동시에 선망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하도록 이끌었어요.
어쩌면 초년의 시간이란 애초부터 그런 이상한 아이러니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설레고 기대하면서도 그런 자신이 부담스럽고 어쩐지 부끄러워서 빨리 떠나보내고 싶은 이중적 마음. 달뜬 혼란으로 가득 차 있는 초년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