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e Park Jan 01. 2020

<애드 아스트라>

내게 대답하는 나

함께 탱고를 추던 (지금도 추고 있거나)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모임이 있다. 9월의 책은 필립 지앙의 <엘르>.

재미있게 읽었지만 막상 약속이 있던 일요일에는 애들 아빠가 치과에 가야 해서 나갈 수가 없었다. (둘 데리고 홍대까지는 늘 느끼지만 무리데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애드 아스트라>를 보러 갔다. 고구마는 하품을 하면서도 끝까지 봤지만 감자는 중간에 한 시간 편하게 취침.

보고 나서는 좀 깜짝 놀랐다. 전혀 상관없이 그저 시간상 좀 비슷하게 읽고 본 <엘르>와 <애드 아스트라>는 이건 뭔가 싶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주인공들은 둘 다 세간에 잘 알려진 사건으로 아버지와 오래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이고 그 아버지로 인해 자신의 인생의 행로가 예기치 않게 바뀌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사람의 아버지는 총으로 여러 사람을 (그것도 아이들을) 쏘았고 다른 한 사람은 추앙받으며 우주로 떠났다.

그러나 요즘 가끔 포털에 뜨는 드라마 제목처럼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마치 이 세계에 있으면서 다른 중력을 하나 더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나 개인과 더불어 누군가의 가족으로의 신분을 이스마엘의 흉터처럼 지니고 살아간다.(아니고 카인이였;;)

80년대 만화책 속 우울하고 고독한 권투선수나 야구선수가 하듯 허리와 발목에 추를 달고 사는 것 같은 압박. 그리고 내가 만일 잘 알려진 살인자의 자식이라면 그리고 여성이라면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과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가 중요한 생존 기술이 된다.

심지어 영웅의 아들이라고 해도 주변의 시선과 기대를 감당하고 사는 데는 일종의 균형감각, 평정을 이끄는 힘, '아버지보다 터무니없이 약한 아들'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영원히 쓰고 있어야 할 하나의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가면은 우리 모두가 하나 이상씩은 가지고 있겠지만 필요한 순간에, 혹은 버거울 때 벗어버릴 수 있다는 게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겠지.

어쨌거나 이 두 사람의 '제정신의 나'를 유지하는 힘은 살아온 시간만큼 강력하고 덕분에 일상을 유지하고 버티기 힘든 고비들을 버텨내고 심지어 크고 작은 성공을 만들어 간다. 두 사람의 평정심이  그들을 남다르게 완성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어느 순간 그들을 옥죈다. 완벽한 방어물은 그대로 완벽한 덫이 되듯이.

 성공 너머 그 어디즘에서 결국은 주변의 자극에 '바람직하게 반응'하는 것 외의, 자신에게 대답해주는 사람으로서 '나'도 필요하지 않을까. 탱고에서도 상대의 리드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언제나 무언가가 비어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처럼. 음악에 반응하는 나 자신을 건져 올려야 하는 것처럼.

 '제어하는 힘'만큼 우리는 산산조각 나 흩어질 수 있는 힘도 필요할 것 같아. 아니, 그건 어쩌면 그럴 수 있는 특별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쌓는 것만큼 하나하나 빼어 내는 것도 기술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테니까.

그렇더라도,
어느 쪽을 선택하라면
(나는 아무쪼록)
능숙하게 부서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