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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Park Jan 01. 2020

영화 <블랙 팬서> 2018년 2월 20일

흑인 왕자의 꿈


“(미케네 문명에서) 세속 전사 귀족인 바실레우스를 규정짓는 것은 부나 권력이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었다.” (데모크라티아/ 한겨레출판.유재원)라는 문장이 좋았다.

<로마의 일인자>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도 신분도 집안도 재력도 무시할 수 없는 스펙이지만 그보다 그 자체로서의 매력과 능력을 가진 인물을 “일인자”로  인식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인물지향적인 영향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람이 가지는 “자성”을 위계적인 사회일수록 철저하게 부정하고 그 반대일 수록 그런 능력을 마음껏 펼치게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블랙팬서가 너무 좋았던 것도 이런 이야기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집단이 강제로, 무력으로 삶을 빼앗겼다가 겨우 벗어나더라도 자유로운 삶을 지탱해줄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기도 여전히 쉽지 않다면, 결정적으로 그 집단에게 다른 집단이나 인간들은 어떤 매력을 느끼게 되고, 그 집단 내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스스로의 어떤 점을 사회적으로 어필하도록 배울 수 있을까?

가난한 아파트촌의 하늘 위에 뜬 우아한 비행선의 불 빛, 양키들의 모자를 쓴 가난한 목동이 양을 치는 언덕 너머 숨은 세련된 흑인들의 도시, 그리고 피난민으로 넘쳐나던 곳에서 지저분한 네온 사인과 굉장한 야경을 선사하는 바다위 의 구조물을 가진 메트로폴리스로 분한 부산에서도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런 이면, 두 얼굴에서 불운과 행운이 겹쳐보이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각자의 인간적인 장점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긴 사회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지는 굉장한 현상(?)인지.

자신이 가진 것들 중에서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매력을 갖추는 것 만큼 중요했다. 그런 점에 세 번의 자기부정 혹은 자기 안의 어떤 잡음을 걸러내는 사건을 이야기 속에서 본 것 같다.

하나는 흑인 왕자의 또 다른 자신 같은 “미국인 사촌”이 왕이 될 물약을 마시고 들어선 정신세계가 조상들의 고향이 아닌 원한이 서린 아버지의 방..이란 점. 그리고 그곳에서 원망과 회한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것.

그리고 흑인 왕자가 다시 죽어 돌아간 세계에서 아버지에게 “우리”만을 지키려고 “다른 이”들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이 절대로 영원한 평온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말하고 돌아설 때.

마지막으로 사촌이 갇혀서 사는 목숨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스스로 가슴에 박힌 칼을 뽑을 때.

교육사회학자인 윌리스는 스코틀랜드의 광산촌의
학교에서 “간파”와 “한계”라는 개념을 이끌어냈었다. 가난하고 공부를 못하는 광산촌의 아이들도 학교가 사회가 주입하는 체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는 점. 그렇지만 그걸 알고서도 체제를 변화시키기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혹은 믿지 못하거나) 그래서 집단 내 다른 소수를 억압하는 데 쉽게 동조한다는 것.

나는 블랙팬서가 이 두 개의 함정을 잘 피해간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건 왕위를 두고 블랙팬서의 힘을 지우고 계급장 떼고 싸울 때 바위 벽 아래에서 응원하던 사람들.

영화 속에서는 흑인들의 풍요로운 이상사회의 시민들이지만 마치 이전에 희생된 여러 세대의
응원과 함성으로 들렸다.

백인 천사가 아니라 흑인 (또는 우리의) 조상들이 서 있는 야곱의 사다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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