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인간관계가 참 좁아지고 있단 생각이 들 때쯤 내 나이를 돌아보니 30살이 되어있었다. 매일 밤 동네 술집에서 만나 천장이 뚫리도록 깔깔거리던 20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스쳐지나간 자리엔 친구들의 청첩장이 자리잡았다.
6월이 시작되는 1일 고등학교 친구 두명에게서 두개의 청첩장을 받았다.
친구 A는 매달 한 번씩 만나기를 3년 정도 지속해왔다. 각자 사회인이 되고, 시간내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때 우리는 '매달 하루 날짜 잡아서 만나자!'라고 정하고 그걸 정말 3년이 넘도록 지속하며 매달 한 번씩 얼굴 보고 한 달 동안의 안부를 주고 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술마시다 취해서 집을 간 적도 있고, 멀쩡히 손흔들며 인사하고 집에 간 적도 있는, 그리고 그렇게 헤어지면 한 달 뒤 다시 만나는 날까지 카톡 하나 하지 않는 그런 사이였던 나와 A는 6월 1일 영등포의 한 술집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친구의 결혼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친구가 딱 한 달뒤에 있을 결혼식 청첩장을 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시시콜콜한 안부인사가 지나가고, 친구는 "얘기가 나온 김에~"라고 말하며 가방에서 종이 청첩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청첩장을 받으면서 밥을 얻어 먹는 자리가 처음이라, 생각보다 나에게서 과한 리액션이 튀어나갔다. 종종 리액션 할 때 '영혼 좀 담아줄래?'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영혼이 듬뿍 담긴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친구의 청첩장은 친구의 모습처럼 아기자기하게 귀여웠다. 평범한 것보다 톡톡 튀는 걸 선호하는 친구는 종이 청첩장도 다른 청첩장과 다르게 특이했고, 모바일 청첩장에서 볼 수 있는 웨딩 사진도 서울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찍은 스냅사진으로 채웠다.
초등학생 때 만났다가, 다른 중학교로 배정받아 생사도 모르고 살다가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났던 친구 A 였는데 어느덧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영원히 내 옆에서 울고 웃을 거 같았던 친구의 청첩장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비록 결혼식장이 수원이라 가는 길과 오는 길이 피곤하겠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그 거리는 지금까지 친구 A와의 우정의 거리를 멀게 만들기에는 부족한 장애물이었다.
친구 B와는 한 때 여행도 같이 갈 정도로 가까웠다. 언제부터 우리의 사이가 멀어졌는지 생각해보면, 아마 몇 년 전 B의 친언니 결혼식 이후가 아닌가 싶다. 멀어질 일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저때부터 서로 바빠졌고, 장기연애를 하고 있던 친구 B는 그동안 군대에 갔던 남자친구의 제대로 추억만들기 바쁜지 연락이 뜸해졌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고, 더욱 만나기 어려워졌다. 오히려 집이 가까워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이였지만, 그런 생각에 오히려 뜸하게 만났고, 연락도 뜸하게 했다. 매번 생일에 연락하면 나는 "나는 언제든 맞출 수 있으니까 시간 될 때 말해줘! 이번엔 꼭 보자!"라고 말했고, B는 항상 "지금 내가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ㅠㅠ 진짜 일 좀 나아지면 연락할게!"라고 답했다.
그렇게 B의 연락을 기다리며 시간은 흘렀고, 친구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변경되었다는 빨간색 표시를 눌러보니 D-숫자가 적혀있었다. 옛날부터 '촉'이 좋다고 생각이 들던 나는 단번에 저 디데이 표시가 결혼까지 남은 기간이겠구나. 생각했다. 장기연애, 친언니의 결혼, 그리고 나이 30, B가 디데이로 표시할 기념일은 결혼밖에 없겠구나.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어느 날과 다름 없이 평범하던 오후, B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다야 잘 지내? 나 6월에 결혼해!" 라고.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일단 축하한다고 보냈다. 축하하는 마음은 진심이니까. B는 다시 일이 한가해지면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또 한 두달이 지나갔다. 다시 연락을 해온 B는 이번에는 진짜 날짜를 잡자며 괜찮은 일정을 물었고, 나는 괜찮은 일정을 말해 그 날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약속은 다시 깨졌고, 일정은 뒤로 밀려 5월 마지막 주가 되었다.
분명 결혼식은 6월이라 했는데, 도대체 언제 만나자는 거지? 생각이 들고 있을 때, 5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 만나기로 했던 B는 주말에 다시 연락을 해왔다. 아버지가 크게 다쳐 경과를 지켜봐야 하기에 만나는 걸 미뤄야 할 것 같고, 날짜는 추후 다시 잡아야 할 거 같다고... 이해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우선이었기에 심지어 걱정도 했다. 만나는 날 자세히 물어보자. 라는 생각에 알겠다며 답장하고 끝냈다.
그리고, 6월 1일. 친구 A를 만나기 전 잠시 카페에서 업무를 하고 있을 때 B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바일 청첩장과 함께 앞으로 시간을 내기 어려울 거 같아 이렇게 모바일로 청첩장을 전달한다며, 부담갖지 말고 시간 되면 와서 밥 먹고 가라며. 나는 그 연락을 받고 답을 할 수 없었다. 회사에 다니는 B보다 시간이 자유로운 프리랜서인 나는 언제나 친구에게 "너의 일정에 맞출 수 있으니" 라는 말을 해왔는데 B는 그걸 무시한 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무시를 당한 느낌이었으며, 그 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결혼하기 직전에야 연락해서는 모바일 청첩장으로 대신하는 B의 태도에 나는 할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B의 연락에 답장을 하지 못했다.
하루에 두 개의 청첩장을 받았고, 하나는 뭉클했고, 하나는 소중했던 추억을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 좁아지는 인간관계에 있어 한 명 한 명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모두에게 똑같은 에너지를 쏟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멀어졌던 친구와는 더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다. 아직 B의 결혼식까지의 시간은 남았고, 그 사이 어떤 마음의 변화가 생겨 혼자라도 결혼식에 갈수도 있겠지만,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내가 결혼할 때에도 부를 수 있는 한 명의 친구를 나는 포기하기로 마음먹을 거 같다.
내 나이 30, 청첩장으로 인간관계가 정리되는 나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