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
그래.
그래도 1년 반을 만났는데 추억을 정리하려고 보니
정리할 추억이 없었다.
이별했다는 사실보다 추억이 없다는 사실이
더 슬픈 청춘이었다.
5년을 사귄 X와 헤어지고 나니 연애를 미친 듯이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아까웠고, 내일보다 젊은 오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알아가고, 불타올랐다 식으면 헤어지기를 반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연애 경험이 많아지면 성숙한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막 만나서였을까? 어른이 된다는 건 추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추억이 없어서 슬픈 인간이 되었다.
무거운 연애를 끝내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더 가벼운 만남을 지속했다. 다가오는 사람 막지 않고, 떠나는 사람은 쿨하게 보내줬다. 연애는 많이 해봐야 한다는 주변 어른들의 조언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미친 듯이 연애에만 몰두했다. 그러면서 또 친구들과 노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연애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 노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가벼운 만남을 지속하니 한 두 가지 단점들이 슬슬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머릿속으로 "나는 언젠간 얘랑 헤어질 거야."라는 생각을 시작했다. 그래서 최대한 단 기간에 내가 줄 수 있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다. 하트 이모티콘은 아낌없이 남발했다. 기대고 싶은 마음을 꾹 숨긴 채, 상대방이 나에게 기대게 만들었다. 먼 훗날 헤어질 때 나는 오히려 더 홀가분할 수 있도록, 상대방은 더 처절하게 슬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하고 연애하고 헤어짐을 말했다.
연애를 하면서도 다른 연애 가능성을 무한으로 열어뒀다. 친구들과 술 마시면서 합석해서 노는 걸 즐겼고, 그렇게 한탕 놀고 난 뒤 허탈한 감정을 뒤로한 채 집에 가서 꿀잠을 잤다. 청춘이라면 그렇게 노는 줄 알았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안 남을 줄 알았다.
너무 혼자 즐긴 탓일까? 아니면 이별을 생각하고 연애를 시작해서였을까? 모든 이별이 슬프지 않았다. 이별할 때가 다가오면 '아, 이때가 드디어 왔구나' 생각이 들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고, 절대로 장난이라도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도 꾹 참았던 헤어지자는 소리를 쉽게 뱉을 수 있었다.
그래도 1년을 넘게 사귀었는데, 헤어진단 사실이 좀 슬플 만도 한데. 전혀 슬프지 않았다. 아니면 슬프지 않은 척을 했던 걸까. 나에게 스스로 최면을 걸었던 걸까? "넌 슬프지 않아.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때가 되어서 헤어지는 거야."라고.
헤어지자는 말에 '그래'라는 대답을 기어코 받아낸 후 1차로 사진첩을 들어간다. 스크롤을 쭉 - 올려, 사귄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장, 두 장,.......... 없다. 더 이상 지울 추억이 없다. 사귀면서 꽤 많이 만나고 데이트를 했다 생각했는데 남긴 것들이 없다. 알바 가기 전 비상구 계단에서 찍어 보낸 사진은 내 셀카니까 내버려두고, 벚꽃 필 때 놀러 가서 찍은 사진.. 도 내 사진이니까 내버려둔다. 온통 내 사진첩엔 그의 흔적이 느껴질 만한 사진은 없었다.
가벼운 연애, 가벼운 만남의 단점은 추억이 없었다. 가볍게 만나고 헤어질 인연이란 생각에 주변 사람들한테도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왠지 보여주는 게 오히려 쪽팔렸다. 헤어질 건데, 사실 내 이상형은 아닌데, 그냥 막 만나는 건데, 굳이 보여줘야 하나, 온갖 핑계를 생각하며 X들을 숨겼다.
글이 쓰고 싶을 때마다 추억을 뒤적거리는 편인데, 그들과의 추억이 잘 생각나지 않아 사랑에 관한 글을 쓸 때면 괜히 마음이 착잡해진다. 가볍게 여러 사람을 만나 다양한 연애를 해 봤다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다 그렇고 그런 연애들이었다. 가슴 찢어지게 아파본 적도, 남자 때문에 미친 듯이 우느라 일상생활을 못하는 일도 겪어보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최선을 다해 사랑해서 그럴 수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거다. 그저 '연애'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또 5년이란 듣기만 해도 무거운 시간을 함께 하기는 무서워서 겁쟁이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위장해 '만나기'만 했던 거였다.
이제와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저 가끔 꿈에 낯설지만 익숙한 사람들이 나오면 그때서야 '아 네가 걔구나, 내 X'라고 떠올릴 뿐. 추억은 없는데, 강서구 본가에 가면 그들이 사준 인형들이 남아있다. 소파에 앉아 그걸 끌어안고 있는 엄마는 알까? 엄마가 안고 있는 인형들이, 내가 가벼운 만남을 하면서 X들한테 받은 인형들이라는 걸.
연애 많이 하라던 엄마의 말을 잘 들은 딸은, 말은 안 했지만 꽤 다채로운 연애를 했었다는 걸. 하지만 어떤 연애를 했냐고 물어본다면, 기억할 추억이 없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연애를 했다는 걸. 귀신같은 엄마는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