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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Aug 10. 2024

특별하지 않은 생일을 보내도 괜찮은 이유

생일인데 뭐 해?
너무 더워서 집에 있으려고, 에어컨 빵빵한 집이 최고다


이제 정말 아홉수가 끝이 났다. 드디어 만 30살이 되는 생일이 지났다. 29살, 아홉수, 그동안 고생했고 너 때문에 무진장 힘들었으니까 다시는 만나지 말자. 언제나 이별의 기억, 무언가의 끝에 기억이 좋아야 전체의 기억이 좋은 기억으로 남는 걸까? 스물아홉, 아홉수를 지독하게 겪은 나는 20대가 너무나 괴로웠고, 힘들었고, 끔찍했다.


그리고 드디어 돌고 돌아 계란 한 판의 나이가 되었다. 예전엔 계란 한 판이란 뜻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어느덧 내가 그 나이에 도달하다니. 시간 참 빠르게도 흘러간다. 생일이면 다들 행복하게 보내라는 말을 해주지만, 무더위의 끝판왕인 8월 초 그것도 4일은 행복하기는커녕 더위 안 먹으면 다행인 날이다.


축하를 보낸 준 이들에게 "고마워 :):" 라며 답장을 보내곤, 편한 잠옷을 입은 채 에어컨을 켜놓고 침대에 대자로 눕는다. 아 - 이 날씨에 태어난 내가 죄인가, 아니면 태어나 보니 날씨가 이 모양 이 꼬락서니 인 탓을 해야 하는가. 그렇게 집캉스를 즐기는 게 생일의 유일한 행복이 되었다.





어렸을 적엔 꼭 생일이 방학 시즌이라 친구들과 같이 보내지 못했던 게 한이 맺혀서일까? 20대가 되어서는 뭔가 생일날은 특별하게 보내야 할 것만 같았다. 애인과 고급진 레스토랑을 간다거나, 날이 더우니 호텔을 예약해 호캉스를 즐겨야 할 것만 같았다. 매년 돌아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생일이 평일이면 무조건 그날은 알바도, 회사 일도 쉬는 날로 정했다. 왜냐, 나에겐 일 년에 하루뿐인 '특별한' 날이니까 말이다.


근데 참 인생은 생각대로 완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애인이 있을 땐, 꼭 내 생일날 더위 먹고 지쳐 누워있고, 가족들은 저마다 바빴다. 친구들은 하필 성인이 되어서도 그 시즌은 휴가 시즌이었다. 어릴 땐 여름 방학에 생일인 게 억울하고 분했다면, 지금은 그냥 여름에 태어난 것 자체가 화가 났다.


조금만 늦게 태어나지. 그럼 가을이고 선선하고 얼마나 좋아. 생일자인 나 조차도 내 생일엔 어디 나가서 놀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더웠고, 지쳤고, 더웠고, 지쳤다. 복날에 아무리 닭을 먹어도 기운은 솟아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뚝뚝 흐르는 불쾌한 땀에 집에서 씻고 시원한 맥주나 마시고 싶단 생각만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올해 생일 케이크


프리랜서로 살면서는 생일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연차라는 개념이 없기에, 일이 있으면 해야만 했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랬다. 아침부터 부랴부랴 할 일을 시작하고 오후 2시쯤 일을 끝내야지만 그나마 남은 하루를 행복하게 만끽할 수 있었다. 심지어 부모님이라도 보려면 전 날 강서구 집을 갔다가, 다시 신림집으로 와서 일을 해야만 했다. 프리랜서에게 생일을 온전히 즐길 여유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위로받을 수 있는 건 친구들의 축하였다. 매일 연락하지 않아도, 특별한 날이면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 그럼에도 그날은 내 생을 하며 진심이든, 아니든, 축하해 줬다는 사실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그만큼 나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아간다. 혹시라도 그들의 생일 축하를 놓칠까 봐)


예전엔 생일 다음날, 다다음날에 쌓인 택배가 많길 바랐는데, 이젠 축하 한 마디에 그냥 기분이 좋고, 오히려 택배는 덜 오면 좋겠다. (나중에 정리하고 버리기 너무 귀찮다...) 그럼에도 생각해서 선물을 보내주는 친구들 덕분에 8월 한 달 내내 행복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예전엔 누구한테 연락이 안 오면 서운하고, 괜히 받았던 선물 또 받으면 살짝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었다. 또 누구는 생일날 레스토랑을 갔다더라, 누구는 생일날 호캉스를 했다더라, 누구는 생일날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명품을 샀던데... 나는 뭐지... 이런 우울한 생각으로 온전히 생일을 보내지 못했을 때도 있었다.


근데 이제는 좀 무뎌져간다. '생일'이란 것에도,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에도, 그저 무뎌져간다. 너무 많이 봤다. 똑같은 음식, 똑같은 포즈, 똑같은 사진... 그러다 보니 이제 그냥 나에 집중한 채 열심히 살아가는 내 모습이 좋다. 바꿀 수 없다면, 그냥 이대로 나답게 살 수밖에.


갑자기 내가 여름이 싫다고, 생일을 10월로 옮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 명품백을 살 수 없고, 괜히 자취하는 집을 놔두고 호캉스를 가고 싶지 않다. 소고기는 이번에 생일 선물로 받아서 굳이 레스토랑 가서 먹을 필요가 없을 거 같다.


무뎌져간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보내준 축하엔 촉촉해진다. 눈가도, 마음도 젖어간다. 무심한 듯, 다정하게 그렇게 올해 생일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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