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문학 작품을 통해 상처와 치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해요. 살면서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게 가능할까요. 똑같은 말, 똑같은 행위가 가해졌을 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여부도, 정도도 달라지는데 말이죠. 상처를 받지 않고 산다는 건 마치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고 사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상처를 받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하나로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인간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죠. 하지만 그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치유가 되기도 하고 상처의 유사(流沙로 한없이 빠져들기도 하지요.
몽고메리의 『허브 정원의 비밀』이라는 작품을 발견하고 첫 부분을 읽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은 한 아이의 모험 내지는 아동용 미스터리 고딕 소설이라고 단순하게 추측했어요. 하지만 읽을수록 이 책은 한 아이의 외로움과 상처의 세상을 보여주었고 그 외로움과 상처를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을 때 얼마나 삐딱해질 수 있는지 보게 되었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며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아이는 행복하다는 것을 어른은 쉽게 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 어른도 한때는 여리디 여린 아이였을 텐데 말이에요.
* 소년 짐스의 삐딱함
짐스는 무슨 사정이 있어서인지 고아로 자랐습니다. 빨간 머리 앤처럼 고아원에서 힘들게 산 건 아니지만 친척 할아버지와 삼촌, 이모와 함께 살아야 했죠. 형제도 없이 말이에요. 아이는 경험이 적다 보니 어른에 비해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은 무료함 때문에 장난을 치고도 싶었겠죠. 이러한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엄격한 규칙만을 강요한 이모와 소통은커녕 좋은 추억 하나도 쌓기 힘들었어요. 이래도 혼나고 저래도 혼나니 짐스는 더 어긋나고 오히려 벌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두려움과 삐딱함을 정당화했는지도 모르겠어요.
* 월터 삼촌의 삐딱함
짐스는 가정교사의 말을 통해 월터 삼촌이 여자를 싫어한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촌은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결혼도 안 하고 마을의 아픈 아이를 돌보는 일에만 신경을 쓰니까요. 삼촌은 아이들이 원래 철이 없다며 이해해 주기에 기대고 싶지만 문제는 너무 만나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삼촌은 첫사랑을 실패한 경험으로 평생 상처를 안고 산 사람이었어요. 얼마나 사랑이 강했으면 다시는 결혼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슬펐을까요. 그의 삐딱함은 결국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친 보호막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요. 작가는 그의 모습을 통해 어른도 얼마든지 상처에 취약하고 서툴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나 봐요.
* 미스 에이버리의 삐딱함
그녀는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죠. 하지만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요. 자신이 받은 상처는 곧바로 타인을 향한 상처로 옮아갔죠.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역시 벽을 친 거예요. 그녀의 의기소침과 잘못된 선택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는지 안타까웠어요.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지닌 이들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긴 할까요. 이 세 사람의 상처를 보면 자신의 잘못 보다는 환경적 일탈로 겪게 된 불행에서 시작했어요. 부모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게 된 건 짐스의 잘못이 아니죠.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은 삼촌은 평생 그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을 겁니다. 화재라는 우발적 사고에 휘말려 외모가 하루아침에 바뀐 미스 에이버리는 또 어떤가요. 이들의 상처처럼 우리도 이러다 할 인과 관계없이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상처든 내적인 상처든 흉터 없이 완전히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 옆에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알아주고 손을 내밀어 다정함을 보여준다면 아무리 큰 상처도 치유되겠죠.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작가가 짐스의 모험을 통해 진짜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생각해 봅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사람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피하는 거죠. 더 깊은 상처를 받고 싶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당연할 수 있겠죠. 이럴 때 당사자와 주변인 모두 숙고의 시간은 필요해요. 숨을 골라야죠. 하지만 상처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 대화, 진심 어린 사과가 이루어진다면 언젠가 상처는 아물 거예요. 결국 용서와 사랑이라는 새 살이 돋아날 수 있겠죠. 저도 앞으로 어떤 난관과 상처를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용기를 내고 싶네요. 사랑과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이야기에 기울일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