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한글날이자 추석 명절 마지막 연휴 날이었다. 운동하러 안드레아와 함께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 가면서 챙기는 소지품이 있다. 휴지, 무선 이어폰, 핸드폰, 마스크 따위다. 그날은 정신이 없었는지 놓고 간 물건이 두 가지나 되었다. 휴지나 마스크는 주머니에 여분이 있어서 괜찮았다. 문제는 핸드폰이었다. 무선 이어폰은 챙겼는데 핸드폰을 놓고 와서 평소 듣던 오디오북을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미 헬스장에 도착할 즈음에 알아챈 터라 다시 집을 향해 갈 수도 없었다. 속으로 '오늘은 지루하게 러닝 머신에서 걷기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문득 러닝머신 위 화면의 블루투스 로고가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고 버튼을 눌렀더니 잠시 후 내 이어폰과 연결이 되었다. TV프로그램을 연결해서 지루함을 달랠 생각이었다. 튼 화면은 KBS 아침마당. '우리말 겨루기'에서 보았던 엄지원 아나운서가 보였다. 한글날에 한글 지킴이로 나온 것 같아 더욱 반가웠다.
마침 한글날이라 그런지 게스트는 한글과 관련된 선생님, 캘리그래피 예술가 및 여행 전문가가 나왔다. 각각의 전문가가 나와 그동안 상식으로만 알고 있던 지식 외의 사연과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들음과 동시에 인상 깊게 남은 내용을 남겨보려 한다. 우선 한글 선생님의 이야기. 훈민정음의 창제 이야기부터 세종대왕의 업적, 한글의 의미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한글이 '비밀 암호'의 역할을 했다는 부분이 놀라웠다. 임진왜란 시기, 공문서 및 외교 공식 언어는 당연히 한자였기에 한글은 외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한글은 상류층의 무시를 당한 문자였고 외국인에게 가르치는 것조차 금지사항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한글이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암호처럼 사용되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선조실록에 중요한 정보가 쓰여 전달된 기록이 있었다.
캘리그래피 예술가의 강연과 무대는 예술의 관점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처음 서예가로 시작한 이 분은 한글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의 서체가 점점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의 치킨 광고, 술 광고 등 각종 상품을 비롯하여 인기를 누렸던 영화 제목으로도 불려 가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분의 일에 대한 철학은 그 상품의 감성을 충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미리 체험하는 것이라 했다. 한 번은 영화 '타짜'를 위해 사비를 털어 도박판에 가기도 했다며 방청객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야기 말미에 이 작업은 재미있으면서도 가슴 아픈 교훈이 있다고 했다. 도박의 분위기를 한글 제목에 표현하기 위해 쓴 돈이 영화사에서 받은 돈보다 더 들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장난으로라도 도박은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을 웃픈 표정과 말투로 전달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여행 전문가는 한글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장소 두 곳을 추천했다. 하나는 여주, 다른 한 곳은 세종시였다. 여주는 소헌 심 씨와 세종대왕의 왕릉이 있는 곳이고 세종시는 왕의 이름답게 한글 건축물을 감상할 기회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나도 금강 보행교이자 자전거 길이 함께 있는 '이응 다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위에서 보면 정확히 한글의 이응을 닮아 거대한 다리의 아름다운 조형이 느껴졌다. 또한 이 다리의 총길이는 훈민정음 반포 일을 기념해 1446m라고 하니 더욱 의미가 깊게 느껴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그냥 여행하는 것보다 타지의 특징과 고유함을 미리 알고 가는 건 큰 차이가 있겠다는 깨달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실 나는 그날의 루틴을 깬 작은 실수 하나로 기분이 안 좋을 뻔했다. 하지만 그 기분에 끌려가지 않고 조금 달리 생각하고 다른 행동을 해 봄으로써 색다른 경험과 배움을 얻었다. 전화위복까지는 아니지만 새삼 익숙한 길이 아닌 새로운 시도, 새로운 길을 가 보는 모험을 체험한 시간이었다.
번역을 하거나 영어원서를 읽으면서도 한국어로 어떻게 하면 표현할까 늘 고민하게 된다.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한국어, 한글에 무지한가를 깨닫는다. '모르는 게 약이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다.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계속 우매한 나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리석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니 장기적으로 볼 때 그리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말이 떠오른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라는 말로 알고 있었는데 원래는 이런 문장이었다고 한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It is better to be a human being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배울수록 괴롭고 공부할수록 힘들다는 기분이 들 때, 이 말을 기억해야겠다. 그래도 앎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게 무지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이다.
한글의 화려한 변신… 국내 최장 금강보행교 ‘이응다리’ 가보셨나요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세계일보
출처: 세계일보 2022년 8월 6일/네이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