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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강물을 거스르다『위대한 개츠비』

by 애니마리아


굳이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이름, 『위대한 개츠비』. 1920년대의 미국의 퇴폐적 문화를 보여주며 한낱 통속소설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장소와 시대를 넘어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영화, 뮤지컬, 독서 모임, 미국 문학, 작가론을 논하며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확인된 번역본만 해도 역자 24명에 52개 판본이며 특히 김욱동 님의 번역본이 충실성과 가독성에서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라고 한다(영미문학 연구회 번역 평가사업단 선정 추천 판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작가의 삶과 배경이 놀랍도록 작품과 비슷해 보여서인지도 모르겠다.(가난했던 작가 생활, 작품 성공 후 결혼, 아내의 신경쇠약 증세, 딸의 출생, 갑작스러운 죽음 등) 실제 작품 속 주요 캐릭터는 그 자신은 물론 가까운 사람들의 페르소나처럼 구현되며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프란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는 1896년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 프린스턴 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1916년 중퇴하고 미 육군에 종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20세기 초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작품과 생애, 스타일 등 여러 면에서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 작가로 평가받는다. 『낙원의 이쪽』을 출판하고 주목을 받았다. 현대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인기에 비해 생전 『위대한 개츠비』는 데뷔작에 비해 절반도 팔리지 않았다고 하며 사후에 재조명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부분은 『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와 유사하다. 1920년 젤다와 결혼했으며 자녀로는 딸, 프란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스카티 Scottie)가 있다. 1940년 『마지막 거물』을 집필 중 연인 셰일라 그레이엄의 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작가의 삶 자체가 파란만장한 만큼 작품의 주인공도 그에 버금가는 인생을 산다. 작품은 '제이 개츠비'라는 젊은 벼락부자의 이야기를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이 화자가 되어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묘사하며 전반부를 시작한다. 개츠비의 본명은 원래 지미 개츠로 '데이지'와 연인 사이였다. 가난한 그가 멀리 파견을 가자 자연히 멀어졌고 데이지는 부잣집 남자와 결혼한다. 데이지의 먼 친척이기도 한 닉은 부자 동네, 이스트에그의 건너편 웨스트에그에 살게 되었다. 그러다 그의 이웃이자 화제의 인물 개츠비가 자주 성대한 파티를 열며 닉에게 접근하더니 데이지와 만나게 해 달라는 청을 하는데…….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강산애)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결말이 더욱 마음에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노래와 소설은 각자의 언어로 장르와 국적을 넘어 '꿈을 향해 전전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런 주제를 담고 있기에 수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언급하는 게 아닐까. 『위대한 개츠비』 가 1920년대 미국의 화려한 재즈 시대에 한 젊은이와 흥망성쇠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일 테니.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부터인가
걸어 걸어 걸어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강산애) 가사 중에서







연어는 넓은 바다를 마다하고 자신을 탄생시킨 근원의 고향을 향해 물살을 거른다. 중력과 거센 마찰력, 반작용의 힘으로 자신이 몸이 부서져라 밀쳐내는 데도 오르고 또 오른다. 자손을 낳기 위해서건, 사랑을 찾기 위해서건, 부를 쌓기 위해서건 그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 오르고 또 오른다. 역경을 마다하지 않는다. 때로는 가는 도중에 다치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으며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아는 채로. 연어의 모습을 통해 인간은 그에 못지않은 본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끝은 누구나 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연민과 응원의 양가감정을 느끼면서 막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감내해야 할 꿈이자 이상이며 운명임을 알기에. 그래서일까. 닉의 마지막 독백은 잔잔한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들고 물러나며 독자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살을 거스르며 나아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p.271/『위대한 개츠비』)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그냥 읽다 보면 얼추 신파극이나 막장 드라마처럼 느낄 수도 있다. 배신당한 한 남자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여인에게 접근하다가 황당한 사건으로 허무한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이 소설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다시 생각나며 다양한 인간 군상, 사랑과 꿈, 집착과 허영이 몰고 오는지 곱씹게 된다. 사람은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며 그 때문에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한다. 어떤 이는 그것을 두고 어리석다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순정이라 부를 것이며 어떤 이는 인생무상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의 화려하지만 우울한 세상의 군상들을 살펴보며 답답하고 화도 나겠지만 작품을 읽고 다시 첫 문장을 읽어보면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땐 이 사실을 기억하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걸 말이다."(11쪽/위대한 개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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