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s of the Dragon)
사랑하는 진모는 남과 북의 대립보다는 하나가 되길 바랐고 그 길을 가게 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며 사상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끌려갔다. 주인공 자희는 진모의 아이를 가진 채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피신했으나 돈을 벌 수가 없었다. 남한의 텃세가 있었고 그녀를 무시하고 기피하며 비난하는 눈길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기지촌에서 가서 웨이트리스 일을 구했다. 시름시름 앓던 아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당시 소설의 배경은 6.25 전쟁 직후, 우리나라가 가장 가난한 국가였던 시기다. 모두가 힘들었고 먹을 게 없었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 때였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북에서 왔다면 종종 색안경을 끼고 무고한 북한 출신들에게도 불이익을 주거나 피했던 시절이다.
그곳에서 자희는 또 다른 신사를 만난다. 물론 진짜 신사는 아니지만 자희의 품격을 알아보고 그녀와 지적인 대화를 나누던 미국인 대령이었다. 미국 남부 출신답게 숙녀와의 춤을 즐기고 자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책을 주며 독려했다. 한쪽 팔을 전쟁에서 잃었지만 군인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했고 여성에 존중과 매너의 태도를 끝까지 유지했던 남자.
자희 또한 딸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불이익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주시 걸(juicy girl: 아래 설명 참조)' 제안을 끝까지 거절했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먼저 제공받은 후 일을 시작했다. 주시 걸이 아닌 허드렛일만 하는 그녀에게 시간당 급여는 집세와 식비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빚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오히려 빚은 늘어만 갔다. 그곳에서 돌아가는 자본주의 구조상 악순환만 일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자희는 다른 소녀들과 달리 주시 걸이 되라는 상사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온갖 궂은일을 하며 견뎠다. 프랭크 대령은 그런 자희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마음 아파했다.
독자로서 나 역시 안타까웠다.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일본군이나 북한 군인처럼 무자비한 강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강대국과 약소국의 역사를 깨우쳤고 각자 이익을 도모하는 조국의 대변자였다. 물론 한쪽이 다른 쪽보다 많이 기울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이 있었고 시작도 못한 애틋함이 있었다. 시대를 잘 못 만나 어그러진 그들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아름다웠다. 서로 처한 운명과 고통을 안타까워할 뿐이라 해도 말이다.
두 사람이 연애를 했다면 정말 자희의 예상대로 결말이 뻔한 관계로 치달았을까. 그녀는 대령과의 대화가 즐겁고 기쁘면서도 결국 자신은 버림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프랭크는 예의 바르게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을 바라볼 때 자신에게 잊지 못할 모멸감을 주었던 일본군을 떠올렸다. 14살에 겪은 그 트라우마는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진모와는 사랑을 할 수 있었는데, 왜 프랭크와는 할 수 없었을까. 진모가 죽음에 몰린 것처럼 프랭크도 어떤 악령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 저주받아 죽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해답의 실마리를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에서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중략) 만약 다른 시간대에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다른 때에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요."
나는 시선을 떨군 채 말했다.
"Do you think we could have fallen in love, you and me?(omitted) Maybe in a different time and place.
I kept my eyes low. "A different time and place."
p.227/『 Daughters of the dragon 』
※주시 걸(juicy girl):
한국전쟁 전후로 미 기지촌에서 미군들 사이에 쓰던 표현으로 한국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한 속어였다. 정식 직업명은 아니었으며 실제 해당인이 아니었음에도 당시 그곳에서 사는 한국 여성의 역할과 외양, 삶의 조건을 왜곡한 명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