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38)

일상

by 도미니

네모반듯한 테이블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 테이블의 한쪽 귀퉁이에 투명한 유리로 만든 물잔이 하나 놓여 있다. 아무 일 없이, 물을 담고 있지만 뭔가 어색하다. 자세히 보면, 유리잔은 테이블 위에 온전히 놓인 것이 아니라 간신히 걸쳐져 있다. 바닥의 4분의 1을 조금 넘겨 테이블에 닿아 있기에 기적적으로 안정적으로 놓인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바람도 불지 않고 기차도 지나가지 않는 아무 일 없는 날, 물잔은 용케도 하루를 무사히 지나지만, 작은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여지없이 떨어져 물을 쏟는다. 다행히 튼튼한 두꺼운 유리라면 별 문제 없이 다시 올리면 되지만, 얇은 여린 유리라면 방법이 없다. 산산히 부서져 원래 상태대로 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일상은 테이블 끝에 걸린 유리잔과 같아서, 아주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두꺼운 유리잔을 준비하는 것이고, 주님께 조금이라도 내 잔을 케이블 중심가까이로 옮겨달라고 기도하고 중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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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이슈가 없는 일상은 평화롭다. 부모님이 언제든 아이를 백업해주실 수 있고, 나는 9 to 6로 일하지만 유연근무나 육아시간을 쓸 수 있고, 정 필요한 경우 동료나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을 수 있고, 일주일에 두번 운동을 할 수 있다.


더할 나위 없는 날들에 감사하지만, 이것이 곧.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 사실 그 불안에 크게 지금을 누리기는 어려웠다.


1) 변호사로부터 변론준비기일에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 나는 꽤 두꺼운 유리잔이라 이제 이 정도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2) 변론준비기일이 우리 아기 생일이다.

- 음..... 살짝 울렁거리긴 하지만 이런 정도의 우연은 늘상 있는 일이고, 사실 내 소송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니 아이 생일에 기일이 잡힌다는 것에 오히려 잘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도 한다.

3) 그의 반박서면을 받았다.

- 이 정도도 견딜 수 있는 두꺼운 유리잔은 아직 못 되었구나. 사고가 또 정지되려는 조짐이 보였다.


곧, 인사이동을 앞두고 있어서 친했던 직원분들과 식사약속이 계속 있었다. 매일 매일 잔잔한 일상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특별한 식당에 가서 특별한 음식을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며 먹는다는 것 자체가, 한두번이어야지.... 2주가 넘게 계속되니 지치고 힘들었는데. 그 와중에 반박서면을 받고. 얼떨결에 열어보기까지 했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안색과 줄어드는 말수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간힘을 써서 주제를 찾아내고, 끊이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하하호호 웃으며 커피까지 마시고 들어와 어두운 휴게실로 직행해서 무너져 내리듯 앉았다.


이제, 그는 이혼을 원하는 않는다고 했다.

본인은 아내와 함께 어려운 상황을 이기고 공부하며 동지애를 느꼈고.. 근데, 아내만 잘되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내용. 래서 이 이혼청구는 기각되어야 한다고 또 말을 바꾸어 써놓았다.


말을 바꾸는 것이 정말 몇 번째인 지 모르겠다. 그 근본없음에 화가 난다. 무슨 생각인지 10년 넘게 그를 겪은 내눈에 뻔히 보인다. 무척 후회스러울 것이다. 수발을 들어주던 아내가 없는 일상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겠지. 당연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또 모든 것은 아내를 떠나게 한 본인 탓이 아니라 떠난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그의 생각회로다. 40년 넘게 살아서 절대로 바뀌지 않을 로직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이 너무 싫은데 사과는 하기 싫고, 그 마음을 저렇게 오락가락하며 표현하는 것인데. 나 정말 언제까지 저 장단에 이렇게 길게 시간을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


이혼의사가 합의 되지 않으면 가사조사를 받아야 한다. 가사조사관에게 한달에 한번을 세번 정도 받아야 한다. 그 말은 곧. 이혼소송 또한 기본 세달이 연장된다는 이야기이다.


손끝으로 피가 줄줄 새는 것만 같다.


매형의 회사에서 매형의 권유를 받아 일한 것은 진실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 산후조리원을 가지 않은 것은 유별난 아내의 선택이었다는 또 비겁한 거짓말. 그 외에도 문맥과 맥락에도 맞지 않는, 도대체 이해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써 있었다.


내 얘기가 안 받아들여지면 어떡하지. 판사가 이 말을 다 믿으면 어떡하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하지.


유리컵은 또 한번 바닥에 떨어지고 물은 모두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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