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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 Jul 20. 2024

이혼일기(74)

에스시탈로프람 정

아이는 만 5세를 향해 달려가는데도, 낮잠을 떼지 못했다. 이제 형님반이 되었으니 낮잠시간이 없어지고 낮잠이불도 가져왔다. 짐이 한결 줄어들고, 낮잠을 안자니 밤에 자는 시간이 일러서 좋아했는데, 며칠 지내보니 그렇지가 않다.


매일 7시 반에 거의 잠든 채로 어린이집을 가도 낮잠 덕에 오전시간을 그럭저럭 버텼던 모양인데, 친구들이 모두 낮잠없이 노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굉장히 피곤해했다. 그러니 퇴근시간이 되어 데리러 가면 짜증도 떼도 전에 없이 늘었다.


잠투정으로 말도 안되는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아이를 붙들고 저녁을 먹이고 놀이를 하자니 엄마인 나도 어쩔 수 없는 상처를  왕왕 받게 되고 너무 고달프다. 퇴근하고 나면 세상이 빙빙 도는데 아이의 요구를 모두 맞춰주기가 어렵고, 또 한동안은 회사에 급한 일이 많이 생겨 7시가 다 되어서야 아이를 찾았다.


하루 12시간 가까이 어린이집에서 피로를 참으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라니, 생각하기도 끔찍하고 또 아프다. 그런데도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외면해버렸다. 지금 내가 그것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


 아가 니가 잘 이겨내야해. 하나님 우리 아기 잘 이겨내게 해주세요.  


 이것은 기도일까 책임전가일까.


때로 궁금했지만 오래 궁금해하지도 못했다. 해야할 일도 처리해야할 일도 너무 많았다. 정말 너무 많았다.


 벌떡 일어나 서랍을 뒤진다. 분명히 어딘가에 남아 있었는데.... 찾았다. 작년에 받아놓고 남았던 항우울제 몇알. 병원갈 시간이 없으니 이거라도 먹어보자.


산도스 에스시탈로프람 정 5mg을 반으로 쪼개면 5살 짜리 아이가 먹는 양이다. 이 정도를 먹고 괜찮아지면 그것도 감사한 것이라도 생각한다. 뭐라도 방법이 있다면 그건 정말 감사한 것이다.


또 되뇌인다.


할 수 없는 것에 비하면 하기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매일 밤 아이를 재우고 일어나 약을 먹고 다시 자본다. 오늘은 안 깨고 아침에 일어나면 좋을텐데, 생각하지만 어떤 날은 1시부터 6시까지. 6개 숫자를 모두 확인하고서야 아침이 올 때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옛날, 그와 함께 살 던 때보다는 지금이 비교할 수도 없이 행복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힘을 내겠다고 나는 물론이고 아이의 상태도 괜찮다고 최면을 걸 듯 우기던 어느 날, 어린이집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어머님.. 00이가 늘 기운이 너무 없어요. 잠이 너무 모자라나 싶어 낮잠 시간을 좀 가져볼까 하는데요.


- 네 선생님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요즘 마음에 걸리는 건데.. 사실 지금 아침에 늦잠을 못자긴 하지만 밤잠 시간이 크게 부족하지는 않거든요. 근데 아이가 우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한번씩 아빠를 만나는 지가 1년이 넘어가는데 최근들어서 표정이 조금 걸렸어요. 뭔가 안괜찮은데 괜찮은 척을 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더니 얼마 전에 잠들기 직전에 저한테 이야기하는데, 엄마랑 있다가 아빠한테 가려면 엄마가 보고 싶어서 슬프고, 아빠한테 있다가 엄마한테 오려면 아빠가 보고 싶어서 슬프대요. 그래서 너무 슬펐어.. 하고 잠이 들었어요.


선생님, 얘가 성격이 워낙 기분파라.. 그래서 내내 시무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진실은 의식하지 않아도 항상 수면 위로 드러난다.


아이가 괜찮다고 믿고 싶은 마음은 바닥이 나버렸다. 내 깊숙한 속사람의 판단력은, 모든 데이타를 끌어모아 지금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보아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본심이 입을 통해 튀어나와버린다.


 일리가 있다며 아이와 이야기해보겠다고 전화를 끊은 선생님이 하원시간이 다되서 다시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우신다.


어머니, 낮잠을 자고서도 조금 활발하다가 또 기운이 없다고 하길래.. 제가 단둘이 안아주면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다룬 곳도 쳐다보고 딴 청도 하다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요. 


아빠랑 엄마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한참 울어서 다독여주고 지금은 또 잘 놀고 있어요....


또 한번 마음이 쿵 내려앉는 소리.


아이구 우리 아가....


오늘은 약을 반으로 쪼개지 말고 한알 다 먹어야겠다  


-----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비틀비틀 거리면서도 한 곳을 바라보며 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지요.


괜찮을 수 있는 은혜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요.


오늘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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