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화고 영상과 선생님과 학생의 방과 후 수업
현우: 샘, 상담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소현: 상담? 그럼! 무슨 상담인데?
현우: …
소현: 뭔데! 뭐 심각한 얘기야?
현우: 어… 그게요, 말하기 좀 껄끄러운 거긴 한데요.
소현: 얘기해 봐.
현우: 그게 사실 제가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요.
소현: 오~ 연애 상담~? 내가 또 이론 박사지.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현우: 아, 그렇게 이론 박사신데… 아니에요.
소현: 이론 박산데, 뭐? 남자 친구 없다고?
현우: 네.
소현: 그냥 나갈래?
현우: 죄송합니다.
소현: 그래서,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현우: 고백을 할지 말지 고민이에요.
소현: 무조건 고백해야지.
현우: 근데 그러기에는 뭔가 좀 고백할 정도는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소현: 뭐가 아닌 거 같은데? 너의 마음이 아닌 것 같은 거야, 아니면 걔가 거절할까 봐 걱정되는 거야?
현우: 모르겠어요.
소현: 걔가 어떤 앤데?
현우: 걔가 어떤 애냐고요? 음… 친구죠.
소현: 어떤 친군데?
현우: 제일 친한 친구요. 중학교 때부터 뭐, 지금까지 쭉 친구였죠.
소현: 일단 지금의 관계는 친구인 건데, 너의 감정이 친구 이상이면 고백해야지. 친구 이상이야?
현우: 그걸 잘 모르겠어요.
소현: 그럼 왜 고백할지 말지가 고민이야? 너의 감정에 확신이 없어?
현우: 그니까,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요즘 뭔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소현: 어떻게?
현우: 옛날에는 되게 친구처럼 티격태격 장난치는 사이였다면 요즘은 서로 챙겨주고 눈치도 보고 그러는 것 같아요.
소현: 걔는 널 좋아하는 거 같아?
현우: 그게 확신이 없어서 제가 잘 모르겠다고 한 거예요.
소현: 그러면 뭔가 좀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낀 구체적인 포인트가 뭐야?
현우: 음… 서로의 다른 남사친이나 여사친에 대해 좀 질투를 하는 게 있어요. 저번에는 제가 아는 여자애하고 만났는데 걔가 화를 내더라고요. 아니지, 화를 낸다기보다는 삐친 거라고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제가 여사친을 만났다고 하니까 왜 자기한테 말도 없이 만났냐고 그러고, 뭐 때문에 만났는지 궁금해하고 서운해하더라고요. 제가 그래서 우연히 만나게 됐다고 했는데, 갑자기 둘이 잘 어울린다고 막 사귀래요.
소현: 걔는 확실히 널 좋아하네. 그것도 엄청 티를 내네.
현우: 근데 또 그런 것도 아닌 게, 저번에는 제가 얘하고 만났을 때 자기가 다른 남사친 만나는 걸 과시하면서 저한테 누구누구 만날 거라고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똑같이 다른 여자애 만날 거라고 자랑을 하니까, 화를 내더라고요.
소현: 딱 봐도 질투하는 거잖아. 고백해! 걔는 지금 네가 고백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현우: 저도 걔가 저를 좋아하나 싶은 게, 어제는 갑자기 자기가 누구랑 사귈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잘해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또 그것도 싫대요. 그러면서 저보고 눈치가 없다는 거예요.
소현: 그러니까, 지금 걔는 이런 거지. ‘내가 지금 다른 남자를 사귀겠다는데 넌 괜찮은 거야?!’
현우: 그렇죠…?
소현: 응. 빨리 지금 나한테 고백해! 이러는 거 같은데? 근데 넌 아무렇지도 않았어? 걔가 다른 남자애랑 사귀겠다는데.
현우: 그냥, 걔가 다른 여자애랑 잘해보라고 잘 어울린다고 그러니까, 저도 똑같이 한 거죠.
소현: 그래서 너도 너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한 거구나. 보통 진짜 좋아하면 무조건 고 아니야?
현우: 근데 제가 입시 준비를 해야 하기도 하고, 지금 같은 시기에 괜히 여자 친구를 만들어서 혹시 방해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도 되고, 또 얘랑 제일 친한 친군데 제가 고백을 하면….
소현: 친구를 잃게 될 수도 있으니까.
현우: 네.
소현: 그렇긴 하지.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면 더 고민되지. 근데 내가 교복 입던 학창 시절을 떠올렸을 때 가장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교복을 입고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는 거거든. 고등학생 때는 고등학생만이 할 수 있는 연애가 있잖아. 그래서 만약 네가 그 애를 진짜 사랑한다면 입시 준비만큼이나 사랑의 경험은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특히나 넌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이니까. 친구를 잃을 각오로 시도해봐야지. 후회만 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 잘 안 돼도 잘 돼도, 너한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현우: 사랑이 저한테 무슨 도움이 될까요?
소현: 음… 결국 영화든 소설이든 모든 작품은 사람이 만드는 거고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만드는 거잖아. 그 안에는 반드시 감정이라는 게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진짜 그때 당시에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지? 나는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의 경험치를 너는 쌓는 거지. 그게 너에게 언젠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거고.
현우: 이야기의 소재로 사랑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소현: 에이, 또 그렇게 말하면 너무 사랑을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런 뜻이 아니라, 진짜 그 애를 사랑한다면, 그 감정에 솔직하고 그 감정을 놓쳐서 후회하지 말라는 거지.
현우: 근데 제가 걔를 사랑하는지를 모르겠어요. 선생님, 사랑이 뭐예요?
소현: 사랑? 너는 뭐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우: 글쎄요. 모르니까 물어봤죠.
소현: 영화 ‘월플라워’ 봤어?
현우: 네.
소현: 주인공 찰리랑 샘이 사랑하는 사이인 것 같아?
현우: 우정이죠.
소현: 왜?
현우: 결국엔 이별을 하니까요?
소현: 애초에 그 둘이 사귄 적이 없는데?
현우: 그러니까 더더욱 우정이죠.
소현: 찰리 생일날 샘이 선물로 너의 첫사랑이 되고 싶다고 했던 장면 기억나? 그러면서 샘이 찰리한테 첫 키스를 선물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잖아. 그 장면은 진실한 사랑 고백 장면이지 않았어? 그리고 찰리도 대답하잖아. 나도 사랑한다고.
현우: 근데 그 직후 파티에서 샘이 자기 남자 친구랑 키스를 하잖아요. 그러면 샘이 찰리를 농락한 게 되는 거 아니에요? 두 명의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 거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이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애초에 그 첫 키스를 선물하는 장면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돼요. 자기 남자 친구 좋아한다면서 오늘만큼은 잊어버리고 널 사랑하고 싶다, 이게 말이 돼요?
소현: 자, 지금 너의 말속에서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 뭔지 알 수 있어. 너한테 사랑은, 우정이 포함돼 있지 않아.
현우: 우정과 사랑은 다르죠.
소현: ‘월플라워’ 등장인물들 관계를 보면 사랑과 우정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그치만 끝내는 걔들이 서로 진실로 사랑했다는 게 느껴지지 않아? 사랑, 우정의 구분이 무의미해. 사랑, 우정을‘마음을 주고받는다’라는 표현으로 바꾼다면 어떤 것 같아?
현우: 어… 사랑도 우정도 둘 다 마음을 주고받는 거죠.
소현: 그치. 서로를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다해서 대하는 것, 그게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관계하고 있는 형태야. 마음을 주고받고 있는 거지.
현우: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건 공감이 되는데, 그래도 우정과 사랑은 명확히 다른 거 아닌가요? 어떻게 남자 친구가 있는데 아무리 친하고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여도 키스를 해요? 그것도 찰리한테는 첫 키스인데. 저는 좀 이해가 안 돼요. 둘을 구분해야 되지 않나요?
소현: 키스라는 그 행위 자체가 연인들끼리의 사랑일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
현우: 네, 그 말이에요.
소현: 우리가 방금 얘기했잖아. 사랑이든 우정이든 마음을 주고받는 관점에서 보자고. 그러면 키스라는 행위도 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일 뿐이야. 넌 여전히 키스가 곧 이성 간의 사랑 표현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거야.
현우: 음… 네. 그런 것 같아요.
소현: 그러면 패트릭이 동성 연인하고 헤어지고서 찰리한테 키스했던 장면은? 패트릭이 찰리를 연인으로서 사랑하게 됐기 때문에 키스를 했던 거야?
현우: 그건 아니죠.
소현: 왜 아닌 것 같아? 키스는 연인 간에만 할 수 있는 행위라며.
현우: 어… 키스를 연인 간의 사랑 표현이 아니라, 누군가한테 사랑받고 싶은 걸 표현한 거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소현: 왜 그렇게 생각했어?
현우: 사실 그 장면 봤을 때 찰리가 패트릭한테 기습 스킨십을 당한 건데 저항하지 않아서 신기했는데…, 그걸 마음 표현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니까 패트릭이 키스를 하고 나서 찰리한테 애처럼 안겨서 우는 게 생각났어요. 뭔가 위로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소현: 그럼 찰리는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현우: 아무래도 그 마음을 느낀 거겠죠.
소현: 맞아. 패트릭이 키스를 하기 전에 한 번도 진지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그때 처음으로 자기 속마음을 얘기하거든.
현우: 역시 제가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네요.
소현: 응 됐고,
현우: 넵
소현: 그러니까 기습 키스이긴 했지만, 그 표현을 찰리가 거절한 건 아닌 거잖아.
현우: 네 그렇죠. 오히려 받아준 거죠.
소현: 그래. 왜 그랬을까?
현우: 뭐 서로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소현: 하나를 알려주니 몇 개 아는구만. 사실 찰리는 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패트릭, 주변 모두와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있어. 그러니까 모두와 사랑을 하고 있는 거지. 다만 그게 좀 서툴 뿐이야. 지금의 네가 너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것처럼.
현우: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우정이 곧 사랑이다, 이거네요?
소현: 그렇지. 우정이 사랑의 일종인 걸 이 영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거지. 그럼 이제 너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걔에 대한 너의 마음이 어떤 것 같아?
현우: 일단… 친구로서 엄청 소중한 건 맞는데, 사랑은 잘 모르겠어요.
소현: 그럼 우정은 두터워?
현우: 그건 확실하죠.
소현: 근데 왜 사랑이 아니야? 봐봐. 넌 여전히 우정, 사랑을 구분 짓고 있는 거야.
현우: 아, 머리론 알겠는데 어려워요. 복잡해요.
소현: 복잡할 게 뭐가 있어.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 진심으로 아낀다,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용기 있게 고백하면 돼. 영화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우정도 곧 사랑이야. 다시 말해서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도?!
현우: 사랑이다?
소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현우: 네.
소현: 뭐, 너네가 얼마만큼 진지하게 마음을 나누고 있는지는 내가 모르지만, 어쨌든 이미 사랑은 시작이 됐다는 거지. 그걸 연인으로 발전시킬 것이냐, 우정이라는 사랑으로 둘 것이냐의 선택일 뿐. 어쨌든 우정과 사랑을 경계 짓지 말고 잘 생각해봐.
현우: 네. 고백을 하든 안 하든 이미 제가 사랑을 하고 있단 얘기네요.
소현: 네.
현우: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보고 고백해볼게요.
소현: 그래, 잘 되길 바란다!
현우: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