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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펭귄 Oct 30. 2022

사랑이란 착각: 그녀(Her)

특성화고 영상과 선생님과 학생의 방과 후 수업

현우: 쌤….

소현: 차였어?

현우: …

소현: 차였네, 차였어.

현우: 그게 아니라, 고백을 안 했어요.

소현: 너 차이고 쪽팔려서 안 했다고 하는 거지?

현우: 저 갈게요.

소현: 잘 가~.

현우: ….

소현: 왜 안 가?

현우: 아 쌤.

소현: 왜 고백 안 했는데?

현우: 고백을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저를 진짜로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요.

소현: 뭘 보고?

현우: 쌤 말대로 그냥 찐한 우정이었던 것 같아요.

소현: 난 네가 하는 게 찐한 우정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사랑이라고 했지.

현우: 아무튼요.

소현: 그래서 뭐가 사랑이 아닌 찐한 우정인 것 같았는데?

현우: 쌤, 사랑은 소유하는 게 아니잖아요.

소현: 오~ 웬일이냐. 겁났던 거 아니야? 차일까 봐?

현우: 에이 그런 건 아니죠.

소현: 그러면?

현우: 아무래도 서로가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게 사랑이라면서요. 근데 걔나 저나, 뭔가 주기보다 받고 싶어 했어요.

소현: 예를 들면?

현우: 걔가 저하고 밀당을 해요.

소현: 아 그거는 좀 마이너스긴 하지. 밀당은 좀 별로야.

현우: 네, 그니까요. 만나자 해놓고 약속 시간 다 되니까 파투 낸다거나….

소현: 그건 진짜 갑자기 일이 생겼던 걸 수도 있잖아.

현우: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소현: 아 그래? 그럼 그건 밀당이라기보다 널 존중하지 않은 거네.

현우: 음, 그렇다기보다는 쌤 영화 ‘그녀(Her)’ 봤어요?

소현: 봤지.

현우: 그럼 잘 아시겠네요.

소현: 뭘요?

현우: 제가 고백 안 한 이유요.

소현: 난 모르겠는데? 내가 네가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현우: 그니까, 사랑을 주기보다 소유하고 싶었던 거죠, 제가.

소현: 그래 그건 이미 들었고, 영화의 뭘 보고 그렇게 생각했냐는 거지.

현우: 일단 주인공은 헤어진 아내에 대한 슬픔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 슬픔을 없애려고 더욱더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이에요. 그러다 결국 그 인물이 추구한 사랑은 실체가 없고 감정만 존재하는 인공지능인 거죠.

소현: 네, 그래서요?

현우: 원래 사랑은 주고받고 아끼는 관계여야 하잖아요. 근데 걔나 저나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아서 고백을 안 한 거예요. 영화 ‘그녀’에서 테오도르처럼 제가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한 거죠.

소현: 근데 ‘그녀’에서 테오도르는 사랑을 받은 거 아니야? 그게 왜 착각이야?

현우: 실체가 없는 사랑이었잖아요, 결국에는. 테오도르는 사랑을 받기만을 원했던 인물이니까, 결국 그게 볼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는 감정만 존재한 실체 없는 사랑이었던 거죠.

소현: 그래서 그 영화를 보고 테오도르에 이입이 된 거야?

현우: 아니요.

소현: 왜 아니야? 지금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AI랑 연애하는 테오도르나 존재하지만 만나주지 않는 너의 그녀에게 서운한 너나 같다는 뜻 아니야?

현우: 다르죠.

소현: 몇 가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현우: 뭔데요?

소현: 첫 번째로 너의 말속에서 넌 이미 인공지능이 감정이 있다고 말을 했어. 인공지능이 감정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현우: 네. 영화 속에서의 인공지능이 감정이 있다고 인정하는 거죠.

소현: 그런데 왜 그 감정이 실체가 없는 거라고 말한 거야?

현우: 인공지능은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소현: 근데 감정은 있다며.

현우: 실체랑 감정이랑 다른 거니까요.

소현: 지금 네가 말하는 실체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얘기하는 거지?

현우: 네. 실체가 있어야 저도 상대방에게 사랑을 줄 수 있잖아요.

소현: 나는 이렇게 생각해. 인공지능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갖고 있지 않았어, 분명히.

현우: 네.

소현: 감정도 또 분명하게 존재했지?

현우: 제가 했던 말이잖아요.

소현: 그래, 네가 했던 말이야. 근데 순서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현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소현: 사랑이라는 게 애초에 눈에 보이지 않아. 맞아?

현우: 그쵸.

소현: 어차피 사랑은 감정의 영역이라 실체가 없는 거야. 넌 사랑의 대상물을 얘기한 거고, 물질적인 형체가 있어야 사랑이 가능하다고 한 거지. 근데 그건 틀린 말일 수도 있다는 거야.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 생각으로는. 왜냐, 테오도르가 보인 모습들, 그게 바로 사랑의 실체거든. 그 감정들을 테오도르가 온몸으로 표현하잖아.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잠을 설치기도 하고. 자, 그럼 두 번째로 또 하나 질문을 해볼게.

현우: 네.

소현: 테오도르가 분명하게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느끼고 그 실체를 보여줬는데, 그런데도 테오도르가 한 게 착각이야?

현우: 착각이죠.

소현: 왜?

현우: 결국에는 감정의 층위를 느끼고 보여준 건 테오드르 밖에 없잖아요. 인공지능은 감정을 흉내 냈을 뿐이니까 적어도 인공지능의 감정은 진실된 감정이 아니었어요. 그저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인 거죠.

소현: 그럼 걔가 약속 어겼을 때 넌 어땠어?

현우: 당연히 기분이 나빴죠.

소현: 그게 바로 네가 감정이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 영화에서도 보여주고자 한 게 단순히 테오도르가 한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끝나는 게 아니야. 너도 영화를 보고 ‘아, 내가 했던 것도 착각이네’라고 끝내면 안 된다는 거지.

현우: 그럼요? 착각이 아니면 뭐예요?

소현: 사랑!

현우: 아니 쌤, 고백을 안 했다니까요?

소현: 고백은 안 했지만 차인 기분일 거 아니야.

현우: 아 선생님 그만 놀리세요, 저 마상이에요.

소현: 알겠어, 알겠어. 아직도 인공지능은 보이고 만져지지 않기 때문에 테오도르가 착각했다고 생각하지?

현우: 네.

소현: 그리고 너의 그녀가 약속을 자꾸 어기는 걸 보고 너도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했구나, 라고 느낀 거고.

현우: 네.

소현: 너의 그녀는 인공지능이 아닌데?

현우: 그건 그런데…, 어쨌든 그 감정들이 가짜였던 거죠. 걔가 저를 진짜로 좋아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하잖아요.

소현: 뭘 근거로 그 애의 감정이 가짜였다고 하는 거야? 그럼 너의 감정은? 너도 가짜였어?

현우: 아니요.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기분도 나빴죠. 가짜였으면 기분 나쁘지조차 않죠.

소현: 그래, 바로 그거야. 착각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감정에 초점이 있는 거야. 물론 네 말대로 테오도르가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했다고 봐도 틀린 건 아니지. 다만, 그 착각 자체가 사랑의 실체라는 거야.

현우: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돼요.

소현: 영화는 그 착각이 곧 우리가 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라는 걸 보여준 거라고 봐. 테오도르가 헤어진 아내와 했던 것도 사랑이고, 인공지능 사만다랑 했던 것도 사랑이야. 그리고 사만다가 진짜 감정을 느꼈든 못 느꼈든 그게 중요하기보다, 사만다가 정말 인간들이 하는 연애 사이클 그 자체를 변수 없이 보여줬다는 게 중요해. 설레고 걱정도 되고 화도 나고 실망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가 다시 화해하고 행복해하는 그런 일련의 감정 스펙트럼을 온전히 보여준 거지. 그래서 너의 말처럼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연애를 이어가고 이별하고 그런데도 또 다른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바로 인간이고 그 자체가 사랑의 실체라는 거지.

현우: 음… 그러니까 쌤 말은 제가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한 거였어도 그로 인해서 여러 감정을 느낀 자체가 사랑이라는 거네요?

소현: 네 맞아요. 사랑의 모습이죠.

현우: 꼭 이루어져야만 사랑이 아닌 거네요.

소현: 네. 그리고 어차피 모든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현우: 네? 쌤 너무 염세적인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남자 친구 없으신 거 아니에요?

소현: 죽을래요?

현우: 아니요. 그래도 모든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까지는 좀….

소현: 그 문장 그대로만 보면 사랑에 대해 비관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무슨 뜻이냐면, 대개 사랑을 한다고 하면 상대와 한 마음이 되고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길 기대해. 그게 말도 안 되는 건데도. 그리고 사실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도 우린 그걸 기대하게 되지. 같은 마음이 되는 걸 사랑이라 여기게 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야. 이 세상에 내 마음을 완벽하게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어. 그건 부모님, 형제자매, 친구 간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인 거지. 그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애초에 사랑은 착각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말이야. 내 마음과 같을 거라는 착각. 사실 그렇지 않고서는 시작할 수도 없어. 이별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이 어디 있겠니.

현우: 듣고 보니 저도 걔 마음이 제 마음이랑 다른 것 같아서 고백을 안 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소현: 그래서 네가 처음 설명한 고백 안 한 이유는 굉장히 성숙한 이유야.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우: 에이, 당연히 의도했죠.

소현: 그래, 그래.

현우: 근데 어떤 이유 말씀하시는 거죠?

소현: 에휴. 소유하는 게 아니라고 했던 거.

현우: 아 맞다, 맞다. 네 그렇죠. 사랑은 소유하려는 게 아니죠~!

소현: 쯧.

현우: 선생님 제자를 너무 하찮다는 듯 대하시는 거 아닙니까.

소현: 조용히 하고, 그걸 알면서도 소유하고 싶어지는 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이야.

현우: 하긴, 친구 사이에서도 친하다 생각하고 많이 배려했는데 그 친구는 그렇지 않은 거 같은 때 섭섭하고 그런 게 있죠. 내 마음과 같길 바란다는 자체가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죠. 크.

소현: …. 이 세상에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타인이라는 말이 있어.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그 사람의 마음을 결코 키우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는 거지. 그 사람 마음은 그 사람 거니까.

현우: 네.

소현: 뭐가 어떻든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지.

현우: 선생님도 꼭 그런 사람 만나시길….

소현: 씨.

현우: 헤헤. 쌤 근데 타인이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잖아요.

소현: 절대.

현우: 그러면 제가 타인의 마음을 소유하려고 해서 결국엔 제가 휘청거린 거잖아요.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소현: 타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법을 말하는 거지?

현우: 네.

소현: 그러면 ‘봄날은 간다’ 한 번 봐봐.

현우: 봄날은 간다요? 너무 제목에서부터 비극적인 거 아니에요? 염세적이신 거 맞는 거 같은데….

소현: 보고 얘기해.

현우: 넵. 한 번 봐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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