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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펭귄 Oct 30. 2022

완전함은 없다, 하지만: 시리어스 맨

특성화고 영상과 선생님과 학생의 방과 후 수업

현우: 쌤, 쌤이 열심히 살아도 완전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저 요즘에 그걸 많이 느끼고 있어요.

소현: 왜, 어떤 점에서?

현우: 시나리오 쓸 때 엄청 느끼고 있죠. 그래서 어차피 완전할 수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소현: 음…. 나도 비슷하게 생각해. 근데, 하나씩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밑도 끝도 없더라고. 그러다 보면 그냥 삶 전체가 무의미해져.

현우: 그니까요. 근데 신기하게 글이 잘 안 써져서 내팽개치고 ‘시리어스 맨’을 보고 머리를 식히고 나니까 또 금방 써지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의미가 없으면 때려치울 텐데 뭔가 조금씩 의미가 생기는 것 같고, 그래서 다시 하게 되고 그렇더라구요.

소현: 그러니 삶이 마냥 오르막만 있거나 내리막만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재밌잖아.

현우: 선생님은 진짜 재밌다고 생각하세요?

소현: 그 질문을 오늘 영화랑 엮어서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내 답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거야. 그리고 나는 진짜 재밌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 걸 수도 있고.

현우: 재밌다고 생각하려고 하는 건 비극적인 거 아니에요? 자신을 세뇌하는 거잖아요.

소현: 어차피 세뇌할 거면 모두 다 의미 없고 가치 없다 느끼는 것보다는 재미라도 있다고 세뇌하는 게 낫지 않아?
 현우: 그쵸. 저도 지금 세뇌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는 시나리오 완성하면 진짜 재밌는 건지 재밌다고 생각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긴 해요.

소현: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수업 때 시나리오의 기승전결을 뭐에 빗대서 설명했었지? 기억나?

현우: 롤러코스터요. 이게 바로 세뇌 교육 아닙니까?

소현: 맞아. 아주 교육이 잘 됐구만. 근데 결국에는 모든 게 비슷해. 삶도 롤러코스터나 마찬가지야.

현우: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오르막을 오르는 거요?

소현: 그렇다기보다, 힘든 오르막이 있으면 재밌는 찰나의 순간이 온다는 거지.

현우: 그러면 인생에서 목표를 잡지 말고 그냥 힘들게 살라는 건가요?

소현: 아니,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거야.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영화를 보는 이유가 같잖아.

현우: 네. 재미를 위해서죠.

소현: 그래. 그러니 힘든 순간에 ‘아, 얼마나 재밌는 일이 펼쳐지려고 이렇게 힘들까?’라고 생각하면 그 힘든 순간도 재밌어지는 거지. 그래서 힘든 게 끝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만큼 더 급한 경사를 오르고 있는 중인 거고, 그러면 경주월드 드라켄처럼 진짜 90도 각도의 짜릿한 순간을 맛보게 되겠지.

현우: 그거는 짜릿하기보다 무서운 거 아닌가요.

소현: 그 역시 받아들이기 나름이지. 정말로 인생이 롤러코스터 같은 게 그거야. 누군가는 그 삶 자체를 재밌게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삶이 두려움 그 자체이기도 하고. 어쨌든, ‘시리어스 맨’을 보고도 알 수 있어. 인생이 완전할 수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 나름이라는 걸.

현우: 아, 맞아요. 주인공이 물리학 교수라 영화 초반에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 설명하잖아요. 제가 그게 뭔지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봤거든요.

소현: 응, 이 영화에서 꽤나 중요한 개념으로 쓰인다고 생각해. 무슨 이론인지 이해했어?

현우: 네, 제가 이해한 건 상자 안에 고양이와 독이 든 유리병을 놓고 실험을 했을 때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의 상태는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가 공존한다는 거잖아요.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진짜 상태를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소현: 맞아. 그래서 확인을 하는 순간에 상태가 결정되는 거지.

현우: 네. 그러니까 삶도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양면의 상태가 공존한다는 거죠?

소현: 맞아. 그리고 내가 직접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잖아. 그러니 난 무의미보단 재미있다고 생각하기를 택한 거지. 진짜 그런지는 상자를 열어봐야 아는 거고. 결국, 살아봐야 아는 거야.

현우: 그런데 영화에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비유하자면 생존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까지만 말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상자를 열어보기 전 무지한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걸로 봤어요.

소현: 맞아. 그러니까 사실 살아봐야 안다는 것도 똑같아. 우리가 미래를 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결국엔 삶이 재밌는지 재미없는지 알 수 없는 거야. 그래도 상자를 열겠다는 결정은 분명히 내가 할 수 있잖아.

현우: 선생님, 그러면 오프닝에서 나온 할아버지도 설명이 되겠네요.

소현: 인간인지 디벅인지 알 수 없다는 거지?

현우: 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어찌 보면 인간과 디벅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인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사람인지 디벅인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없다는 거죠.

소현: 그렇지만 그걸 확인하겠다는 결정은 할 수 있어. 남자의 아내가 그 할아버지를 악령이라 믿고 찌른 것처럼.

현우: 그러면 악령으로 확인된 거 아닌가요? 할아버지가 고통을 느끼지 않잖아요.

소현: 나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해. 고통을 못 느낀다고 했지만 피를 흘리며 나가잖아. 그리고 남편은 여전히 할아버지가 인간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아내에게 내일 아침에 시체가 발견될 거라고 걱정해. 근데 아내는 오히려 악령을 쫓았으니 신이 축복할 거라고 말하잖아. 결국 그 오프닝에서 시사하는 건 ‘알 수 없음’과 ‘결정’이라고 볼 수 있어. 남편에게는 할아버지가 여전히 인간이고, 아내에게는 악령이야.

현우: 아, 그러니 주목해야 할 건 인간인지 디벅인지가 아니라, 그걸 확인하기 위해 사람일 수도 있는 할아버지를 찌르길 선택했다는 거네요.

소현: 그렇지.

현우: 그러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제 인생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주인공이 F 학점을 준 학생에게 현금 뇌물을 받고 결국 C- 학점으로 고쳐주는 결정을 한 것처럼요.

소현: 그게 옳다고 생각해, 아니면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해?

현우: 그건 저야 모르죠. 주인공이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거죠.

소현: 그래, 봐봐.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야.

현우: 그런 것 같네요. 그러면 선생님은 인생에서 가장 옳았다고 생각하는 선택이 뭐예요?

소현: 나는,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목소리 냈던 게 가장 옳았던 일이라고 생각해.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현우: 그게 무슨 일인데요?

소현: 대학교 1학년 개강 첫날에, 학과 선배들이 신입생 전체를 집합해서 단체 기합을 준 일이 있었어. 이유는 신입생 중 한 명이 교내에서 흡연을 했다는 이유였는데, 신입생 70명 중에 한 명이 가지 않았고 그 한 명이 나였어.

현우: 오, 멋있네요. 근데 왜 안 가셨어요?

소현: 부당한 일이니까. 성인이 흡연 장소에서 흡연을 하는 게 70명의 신입생이 벌을 받을 이유가 아니잖아. 나중에 동기들한테 들어보니 여학생들은 무릎을 꿇고 남학생들은 엎드려뻗쳐 상태로 3시간을 벌 받았다더라고. 남자애들 몇은 맞기까지 했다고 해.

현우: 다 같이 안 가면 되는 건데 69명이 갔다는 게 신기하네요.

소현: 사실 모두 알고 있었을 거야. 선배들이 기강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신입생을 집합시켰다는 걸. 근데 나는 그들의 선배놀이에 동참하지 않기로 결정한 거지. 대신 그 일로 동기들 눈치를 봐야 했어. 왜냐하면 선배들이 만드는 매커니즘은, 마지막 신입생 1명이 올 때까지 너희는 벌을 받을 것이며 너희들이 벌을 받는 이유는 그 마지막 1명 때문이다, 이거니까. 그래서 한 학기 동안 나는 같은 과에 친한 친구가 없었어.

현우: 혼자 다니셨다는 거예요?

소현: 난 타과생들이랑 놀았지~.

현우: 근데 어찌 보면, 한 학기 동안 같은 과 친구를 못 사귄 거니까 옳은 선택이라고 말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그런데도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소현: 내가 그렇기 믿기 때문이야. 결국 우리는 생각하기 나름이고 믿는 대로 사는 거니까.

현우: 저도 제가 시나리오를 쓸 때 힘든지 재밌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쓰냐에 따라 바뀌는 거네요.

소현: 맞아. 그리고 다 쓰고 나서 재밌다고 믿으면 그런 게 되는 거겠지.

현우: 이렇게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자체가 1초에 수십 번 날갯짓하는 벌새 같네요. 다음 주에 영화 ‘벌새’로 얘기해보는 거 어떠세요?

소현: 자연스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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