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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펭귄 Oct 30. 2022

가장 인간적인 인간: 피아니스트

특성화고 영상과 선생님과 학생의 방과 후 수업

소현: 넌 왜 이 영화로 얘기해보자고 했던 거야?

현우: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주인공이 피아니스트의 숭고함을 잃지 않기 때문에 보자고 했어요.

소현: 우리가 지난번에 ‘케빈에 대하여’에서 불안을 낳은 엄마 에바에 대해 얘기하면서, 불안은 자신을 자신답지 않게 하는 것이면서도 그걸 떨칠 수 없다는 얘기를 했잖아. 그래서 네가 자신을 잃지 않을 방법을 이 영화로 얘기해보자고 했고.

현우: 네.  ‘피아니스트’에서는 주인공 스필만이 피아니스트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한 인물인데, 외부의 상황 자체가 극한의 불안 상태잖아요. 그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견뎌낸 게 숭고하다고 느껴졌어요.

소현: 맞아. ‘피아니스트’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잖아.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지. 인간의 불완전함과 그로 인한 고통의 역사가 그려진 영화야.

그러면 그런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이 영화에서 찾았어?

현우: 네.

소현: 뭔데?

현우: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지키는 거요.

소현: 주인공 스필만이 지킨 아름다움은 뭔데?

현우: 피아니스트라는 자신의 정체성이죠.

소현: 다시 말하면,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거네?

현우: 음,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정체성을 지키는 걸 뜻하는 거죠.

소현: 그럼 스필만이 피아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지켰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은 뭐가 있어?

현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자면, 스필만이 외적으로 많이 피폐해져서 전혀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야생적인 몰골로 아름답게 연주한 장면이요.

소현: 그 장면을 위한 영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상 깊은 장면이지.

현우: 공간도 그렇고, 스필만 자신도 그렇고 생기 없는 모습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내뿜는 게 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켰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소현: 결국 인간이 불완전한 걸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내적인 아름다움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스필만이 그걸 보여준 거고.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건 살고자 하는 생존 본능인 거지,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잖아.

현우: 네.

소현: 그러니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 정체성을 안다는 게 생존에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그 정체성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게 했다고 표현하고 싶어. 그래서 내가 좀 전에 스필만이 정체성을 지켰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 뭐냐고 물어본 건데, 그런 야생적인 환경과 생활 속에서도 스필만이 종종 상상으로 피아노를 쳤던 장면들이 있다는 거 기억해?

현우: 네.

소현: 바로 그런 장면들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들인 거지.

현우: 네. 제가 한 말이랑 같은 말인 거네요. 결국 생존 본능만 남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스필만은 피아노를 치는데, 그런 상황에서 피아노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당장 먹을 수 없어서 죽게 생겼는데. 그런데도 스필만은 피아노를 치는 거고, 그게 바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모습이라는 거죠?

소현: 정확해요. 그러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재밌는 게, 불완전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양극단에 있어 보이는 수식이 공존하는 존재라는 거야.

현우: 그러면 이 영화가 인간다움을 진짜 잘 표현한 거네요. 인간이 만든 전쟁이라는 악과,  그 속에서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을 보여줬으니까요.

소현: 맞아요. 그러면 우리 인간 모두에게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동의해?

현우: 네, 동의합니다.

소현: 인간 각자의 아름다움이란 어떤 걸까? 이건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네가 생각하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거야.

현우: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독창성인데, 가장 독창적인 게 인간 개개인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세상에 자신 하나밖에 없는 독창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요. 그래서 정체성이 가장 아름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현: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독창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게 정체성이자 아름다움이라는 뜻이지?

현우: 네.

소현: 나도 동의해. 그러면 모두들 자신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면 얼마나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겠어. 근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정말 많아. 애초에 자신이 독창적인 존재라는 걸 인지조차 못 하는 사람들도 많지.

현우: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거요?

소현: 응. 나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때가 있었고.

현우: 아, 전에 수업 시간에 얘기해주셨던 거죠? ‘너 자신을 알라.’

소현: 맞아.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무지한 상태를 두고 했던 말. 나도 고등학교 때 책으로 그 말의 뜻을 접하고 충격적이었어. ‘그러게, 나는 아는 게 뭐지? 아무것도 없네.’ 그러면서 고뇌에 빠졌었지.

현우: 저도 운동을 그만두고 두 달쯤 됐을 때가 딱 그런 걸 느꼈던 때 같아요. 처음에 운동 그만두고는 너무 행복했어요. ‘아 이제 힘든 거 안 해도 된다.’ 하면서요. 근데 그게 두 달 정도만 행복했지, 그 후로부터는 정신적으로 힘들더라고요. 그때가 제 인생에 가장 큰 권태가 찾아온 때였던 거 같아요.

소현: 권태로운 감정이 진짜 사람을 쓸모 없다고 느껴지게 만들지.

현우: 맞아요. 그때가 방학이라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서 생각을 진짜 많이 해 봤어요. 나는 뭘 위해서 태어났을까, 나는 무슨 존재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나를 모른다는 걸 처음 느꼈던 것 같아요.

소현: 지금은 알 것 같아?

현우: 알아가는 중이죠. 선생님은 정체성이 뭐예요?

소현: 사실 나도 뭐라고 정의해야 하나 싶어. 단지 내가 확실히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네가 말했던 대로 내가 독창적인 존재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지. 스필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했잖아. 그래서 나는 스필만이 부러워.

현우: 저도 부럽네요.

소현: 재능이 있고, 그걸 갈고 닦아서 장인의 궤도에 올랐고, 심지어 그걸 사랑하는 사람이야. 얼마나 아름답니. 그게 진짜 숭고한 모습인 것 같아.

현우: 그쵸. 그 아름다움이 결국엔 스필만의 목숨을 살려줬잖아요.

소현: 그랬지. 전쟁통에 전혀 쓸모없는 피아노 연주 한 번이 스필만을 살렸지. 진짜 끝이구나, 이제 저 독일 장교 총에 허무하게 맞아 죽겠구나, 했는데 연주 한 번으로 목숨을 건졌잖아.

현우: 결국 그 독일 장교도 악행을 저지르는 편에 서 있으면서도 연주를 해보라고 하고 스필만을 살려준 걸 보면, 인간은 아름다운 것에 숭고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소현: 그래서 예술이 ‘무의미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잖아.

현우: 무의미의 의미가 뭔가요? 무의미는 그 자체로서 무의미잖아요.

소현: 딱 스필만의 극적인 생존 장면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아. 생존을 위해 예술이 전혀 필요가 없잖아.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운 걸 탐해. 음악을 짓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하잖아. 그걸 통해서 우리가 무슨 의미를 찾을 것인가, 하면 딱히 없다는 거야.

현우: 그러면 결국에는 무의미한 것에 예술로서 의미를 두려고 하는데, 사실상 다 무의미하다는 거네요?

소현: 그렇다고 모두 다 허무하다, 그런 뜻은 아니야. 어떻게 보면 예술뿐 아니라 삶 전체가 그래. 무슨 의미가 있겠어. 우리가 사는 목적이 뭐야? 뭘 위해 태어났어? 그건 정해져 있지 않잖아. 근데도 우린 일단 태어났으니 살아가야 돼. 그것처럼, 예술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그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내지. 도대체 살아가는데 하등 쓸모없는 그런 것들을 왜 하는 걸까, 아무리 찾아도 딱히 이유가 없어. 그런데 그 행위 자체가 숭고하기 때문에, 무의미함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 같아.

현우: 인간의 탄생조차 무의미하다고 하셔서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요.

소현: 뭔데요?

현우: 결국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거잖아요. 인간은 항상 의미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무의미한 세계를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름다운 정체성인 거죠.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름다움이 무의미의 의미가 있다는 것과 같이, 정체성 또한 무의미함에 의미를 둠으로써 우리를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소현: 그치. 인간은 모두 각자만의 악기가 있으니까 그걸 연주하면 되는 거야. 그게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인 거지.

현우: 선생님의 악기는 뭐예요?

소현: 음, 지금으로서 나는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삶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찾아내는 게 내 무기이고 악기인 것 같아. 그걸 내 방식대로 표현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게 능력인 것 같고, 그걸 활용해서 너희들한테 영화 수업을 하고 있으니까. 넌 어때?

현우: 저는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의미가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목표를 잡아도 그 목표가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면서 열심히 살 수 있는 거죠.

소현: 그래, 나는 현우의 그런 점이 아름다워. 진짜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고 하잖아. 대단한 거야.

현우: 아직 멀었죠. 그리고 지금 든 생각이, 스필만을 그렇게 부러워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스필만도 어쨌든 인간이잖아요. 다시 말해서 완전하지 않은 존재라는 거죠.

소현: 어쨌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게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는 걸 택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아. 비록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을지라도. 그럼 다음에는 ‘시리어스 맨’으로 얘기해봐도 좋을 것 같다.

현우: 네. 보고 올게요. 제목부터 좋은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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